2022년도 저물 무렵인 12월 27일 경기 일산동부경찰서 수사 관계자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알렸다.
택시 기사 A 씨(60)를 살해한 뒤 시신을 옷장에 숨겨 놓았던 이기영(32·1990년생)이 "지난 8월 3일 동거하던 18살 연상의 여자친구 B 씨(50)도 살해, 파주시의 한 개천에 시신을 버렸다"고 진술했다면서 관내 경찰력을 동원해 이기영이 지목한 시신 유기 장소를 훑고 있다고 밝혔다.
이후 이기영이 피해자들의 신용카드 명의를 도용해 1억 3000만 원에 이르는 돈과 피해자의 집을 가로챘고 서류상 허위 업체를 만든 뒤 '코로나19 소상공인 지원금' 1000만 원도 받아낸 사실이 드러났다.
판사도 "사형을 선고할까 정말 많이 고민했다"고 할 정도로 이기영의 잔혹함, 뻔뻔함, 사이코패스적 성향에 치를 떨었다.
"크리스마스인데도 아빠와 연락이…"·이기영의 새 여자친구, 옷장 열어본 뒤 기겁
A 씨의 딸은 아빠와 며칠 동안 연락이 닿지 않자 12월 25일 새벽 3시 30분쯤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상했던 아빠가 평소와 달리 '바빠'라는 짧은 문자만 보내자 이를 수상히 여긴 딸은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A 씨 동선을 추적하던 경찰은 12월 25일 오전 11시 21분 "우리 집 옷장에 사람이 죽어 있다"는 신고를 받고 경기도 파주시의 한 아파트로 달려갔다. 확인 결과 시신은 A 씨.
경찰은 신고자인 이기영의 여자친구 C 씨로 상대로 몇 가지를 조사한 뒤 이기영을 살해 용의자로 특정, 추적에 나섰다.
곧이어 고양시의 한 대학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던 이기영을 발견, 긴급체포했다.
접촉사고 낸 뒤 "현금으로 합의하자"며 집으로 유인, 살해 후 카드 훔쳐
이기영은 2022년 12월 20일 오후 10시 20분쯤 음주운전을 하다가 경기도 고양시의 한 도로에서 A 씨의 택시와 접촉 사고를 냈다.
차에서 내린 이기영은 A 씨에게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 합의금과 수리비 등을 현금으로 충분히 주겠다"고 타협안을 제시, 승낙을 받았다.
이기영은 "지금 가진 현금이 없으니 파주시 우리 아파트로 가자, 거기서 주겠다"며 A 씨와 함께 자기 집으로 갔다.
A 씨와 합의금을 놓고 언쟁을 벌이던 이기영은 둔기로 A 씨 머리를 내치려 살해한 뒤 시신을 옷장 속에 넣고 이불로 덮어 버렸다.
이기영은 "합의금 액수를 놓고 말다툼 끝에 흥분해 둔기를 들었다"고 했지만 곧이어 "음주운전으로 실형을 산 뒤 2021년 6월 출소, 아직 누범기간 중으로 A 씨가 신고하면 가중 처벌받을 것이 두려웠다"며 살해한 진짜 이유를 털어놓았다.
택시 버린 뒤 블박 삭제…피해자 카드로 대출, 여친 명품백 등 5000만원 사용
이기영은 A 씨의 택시를 집에서 1km가량 떨어진 곳에 버린 뒤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찾아 버렸다. 이어 자기 차 블랙박스 메모리까지 삭제해 버렸다.
또 A 씨 지갑에서 카드를 빼내 4000만 원이 넘는 대출을 받는 한편 여자친구 C 씨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겠다며 수백만 원짜리 명품 가방을 사는 등 체포되기까지 4일 남짓한 기간에 5000만 원이 넘는 돈을 편취했다.
경찰, 이기영 집 소유주 B 씨 행불 추궁…"내가 죽였다" 자백받아
이기영을 체포한 경찰은 집 명의가 B 씨 앞으로 돼 있는 점, B 씨가 8월 초 이후 모습을 감춘 점, B 씨 명의로 신용카드 대출 및 사용 내역이 최근까지 있었던 점을 주목해 이기영을 상대로 B 씨 행방을 캐물었다.
이기영은 "B 씨가 갑자기 집을 나갔다. 나도 행방을 모른다"며 완강히 버텼지만 경찰은 △ B 씨가 자기 집을 놔두고 가출한 이유가 없다 △ B 씨 실종신고를 왜 하지 않았냐 △ B 씨가 모습을 감춘 직후 새로운 여자친구 C 씨와 동거에 들어간 점이 수상하다며 이기영을 추궁 "지난 8월 3일 B 씨를 죽인 뒤 파주시의 한 강가에 버렸다"라는 자백을 받아냈다.
집도, 휴대폰도, 생활비도 죽인 전 여자친구 돈으로…8000만 원 넘게
이기영은 B 씨를 살해한 뒤 B 씨 카드로 흥청망청 생활했다.
B 씨 명의로 휴대폰을 개통하고, B 씨 카드로 신용대출을 받았고 유흥비, 물품 구입, 자동차 기름값 등 대부분의 생활비를 B 씨 카드로 냈다.
그렇게 해서 이기영이 죽은 B 씨로부터 빼간 돈이 8000만 원이 넘었다.
유부남 이기영, 18살 연상녀와 불륜 끝에 이혼…연상녀 등쳐 생할
경찰 조사 결과 이기영은 2018년 2월, 18살 연상녀 B 씨와 만났다. 당시 유부남이었던 이기영은 3년여간 불륜을 이어오다가 2021년 6월 아내에게 들켰다.
이기영은 반성은커녕 아내에게 '이혼하자'고 통보한 뒤 2021년 12월 B 씨 집으로 들어와 동거에 들어갔다.
동거 초기엔 가족에게 빌린 돈을 B 씨에게 주면서 있는 척했지만 2022년 2월, 아내와 이혼한 뒤에는 본색을 드러냈다. B 씨에게 대출받게 해 생활비와 자신의 용돈으로 사용하는 등 무위도식의 나날을 보낸 것.
이 문제로 B 씨와 다투던 이기영은 끝내 B 씨를 살해해 집과 카드를 자기 것처럼 사용했다.
한편 경찰은 이기영이 지목한 곳에 경찰력과 드론을 투입했지만 끝내 B 씨 시신을 찾지 못했다.
1심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형 있었다면 택했을 것…대단히 잔혹"
검찰은 "이기영의 행위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며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1심인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형사합의1부(재판장 최종원)는 2023년 5월 19일 강도살인,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보복살인, 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기영에게 무기징역과 함께 30년간의 위치추적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을 명령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잔혹한, 인면수심 범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사형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내려야 하는 형벌이다"며 검찰 요청을 물리친 뒤 "만일 법이 허용했다면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형을 선고,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켰을 것"이라고 이기영의 죄질은 극히 나쁘다고 질타했다.
2심 "사형이 옳지 않나 무척 고민했다"…고심의 무기징역형
즉각 항소한 검찰은 2심에서도 사형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2023년 10월 19일 서울고법 형사3부(이창형 부장판사)는 "범행의 잔혹함, 동기와 결과를 볼 때 인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게 마땅할 수 있어 형을 정하는 데 많은 고민을 했다"면서도 "인간의 생명 자체를 박탈하는 사형 선고는 극히 예외적이어야 한다"며 1심의 무기징역형을 유지했다.
buckbak@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