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한완상 전 부총리는 평화에 대해 설명하며 성서적 비유를 들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자가 소의 여물을 먹는 날 평화가 온다.’ 사자가 소의 뼈까지 씹어 먹으면서 어떻게 평화를 이루겠습니까. 구약 시대 사람들은 기존 질서가 완전히 뒤집히는 천지개벽 같은 평화를 꿈꿨던 겁니다.”(사진=이영훈 기자)
원로 사회학자이자 통일부총리·교육부총리를 지낸 한완상(90) 전 부총리는 병오년 새해를 맞아 경색된 남북관계의 해법을 북극항로를 매개로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극항로는 유럽과 아시아를 기존 항로보다 훨씬 짧게 잇는 해상 교통로다. 부산에서 로테르담까지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면 약 2만㎞로 30~40일이 걸리지만 북극항로를 활용하면 약 1만 3000㎞로 이동 시간이 24~25일로 줄어든다. 최대 15일 단축되는 셈이다. 연료비와 운임 절감 효과도 커 한국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한 전 부총리는 “북극항로를 통해 유럽으로 물자를 보내고 들여오는 것은 수에즈 운하를 하나 더 여는 것과 다름없다”며 “이를 해낼 기술과 지식을 모두 갖춘 나라는 한국뿐”이라고 강조했다. 쇄빙선 건조와 운영 역량을 동시에 보유한 국가 역시 한국이 유일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북극항로가 열리면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위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항해시대가 대서양을 중심으로 열렸다면 북극항로는 유라시아 문명을 다시 잇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더이상 변방이 아니라 러시아·중국·유럽을 연결하는 무역의 중심축으로 부상한다.
한 전 부총리는 “(북극항로는) 21세기의 수에즈 운하이자 파나마 운하”라며 “경제적 이익 뿐만 아니라 이를 공동으로 활용하는 국가들 사이에 평화를 도모할 수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다만 현재 정부의 대북 구상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전했다. 북한의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와 금강산을 연계한 관광 재개가 논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다. 그는 “북극항로 개발이 오히려 국제적으로 훨씬 큰 관심을 받을 수 있다”며 “이재명 대통령도 이런 전략을 고민해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는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착한 사람이 용기를 가질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인생관”이라고 소개했다.(사진=이영훈 기자)
당시 그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김일성 주석과 관련된 일화를 전해 모두를 웃게 했다.
한 전 부총리는 “김 대통령 취임사에 담긴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는 문구를 자신이 썼고 이를 전해 들은 김 주석이 크게 감동했다고 김 위원장에게 말했다”며 “그동안 미워하고 경쟁하며 싸웠지만 동맹국보다 한민족이 낫다는 의미를 전했더니 김 위원장도 ‘아 그렇습니까?’라며 파안대소했다”고 전했다.
그날 저녁 문재인 대통령은 김일성광장에서 15만 명이 모인 가운데 연설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았고, 헤어져 산 시간은 70년에 불과하다”라는 발언에 현지 반응은 뜨거웠다. 이후 남북관계가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기대도 컸다. 그러나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변화는 없었다고 그는 전했다.
한 전 부총리는 “북한은 신년사에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제안했지만 우리 정부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며 “개성공단은 단순한 경제시설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공장이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기회를 놓친 것”이라며 아쉬움을 전했다.
그가 이처럼 직설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배경에는 그의 삶이 있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였던 그는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투옥과 해직을 겪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여정이 시작됐다.
-사회학 교수에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민주화운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개인적인 불만 때문이 아니었다. 월급이 적어서도 학교의 통제가 유난히 심해서도 아니었다. 어느 날 내가 강의하던 교실에 형사가 들이닥쳐 학생들을 끌고 가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숨이 막힐 만큼 살벌한 시절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학생을 잡아가는 국가가 과연 국가일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국가 폭력의 문제이자 전체주의의 뿌리였다. 학문 공동체는 전체주의와 맞서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지금 내가 다시 젊은 교수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상황이라면 주저 없이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이후 해직과 옥고를 치렀다. 당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남산 톨게이트 인근 터널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당시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끌려갔다. 김대중 선생을 중심으로 민주화를 모색하던 문인과 종교인, 교수, 노동자들과 교류하며 성명에 참여했다는 이유였다.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순간은 새벽 4~5시께 들려오던 학생들의 신음소리였다. “엄마, 왜 나를 낳았어요”라며 울부짖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정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이해찬 전 총리도 당시 함께 구속됐나.
△그렇다. 학생 시절의 그는 매우 온순하고 조용한 편이었다. 그래서 ‘저 학생이 무엇을 하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후 그는 민주화운동의 사자처럼 변했다. 한 개인을 그렇게 변화시킨 것은 결국 이 땅의 반민주적 정치체제였다.
-해직 후 미국으로 갈 때 제임스 레이니 에모리대 총장의 도움을 받았다.
△레이니 박사를 만난 것은 내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와 해방 직후 혼란기에 미국 군사정보 분야에서 일했다. 김구 선생을 비롯해 여운형·송진우·장덕수 등 주요 정치 지도자들이 줄줄이 저격범의 손에 쓰러질 때 젊은 레이니는 이들을 조사하는 일에 참여했다. 민족의 비극을 목격한 것이다. 동시에 하와이 등지로 이주한 한국인들이 힘겹게 일해 번 돈을 모아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모습을 보며 이 민족의 강인한 생명력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한국을 단순한 냉전의 현장이 아니라 신학적·윤리적으로 다시 세워야 할 공동체로 봤다. 그리고 이것은 그를 목회자의 길로 이끈 계기가 됐다. 이후 예일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신학을 공부한 그는 1960년 무렵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와 연세대에서 기독교 윤리를 가르치며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됐다.
우리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내가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 직후인 1970년대 초반이다. 에모리대 총장으로 취임한 그가 한국의 동문과 친구들을 만나러 왔을 때였다. 나는 투옥 이후 학교에서도 해직돼 앞길이 막막했다. 그때 레이니 박사와 미국 내 기독교·인권 네트워크가 길을 열어줬다. 학문과 연대, 그리고 우정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이후 레이니 박사가 주한미국대사로 왔다.
△김영삼(YS) 정부 시절이다. 당시 나는 통일부총리였다. 평화주의자였던 레이니 대사와 YS는 기본적으로 잘 맞지 않았다. 그 시기 미국은 이른바 ‘일괄타결’ 즉 북한이 원하는 것을 일정 부분 제공하고 그 대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자는 입장이었지만 정부 내 냉전적 사고를 가진 세력들은 끝까지 이를 반대했다. YS는 어머니가 공산주의자에게 희생된 개인적 경험 탓에 강한 반공주의자였다. 민주화운동의 기수로 명성을 쌓았지만 그 지점은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레이니 대사가 핵 문제와 관련해 북한의 입장을 일정 부분 이해하자고 하면 YS는 잘못된 판단이라며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내가 여러 차례 조정에 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한 번은 레이니 대사가 YS와의 면담을 마치고 나와 “왜 저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레이니 박사가 에모리대 총장 시절 김대중(DJ) 당시 총재가 특강을 했을 때는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으면서 이후 YS가 특강을 했을 때는 강사료만 지급했다고 하더라. 한국 정치에서는 누가 이기고 질지 알 수 없는 거두들인데 한 사람에게만 편애했다는 인식을 심어준 건 당신 책임 아니냐고 하니 깜짝 놀라더라. 친구를 나무란 셈이었지만 나 역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인데 한 번은 청와대에서 레이니 대사에게 들어오라고 하면서 차량에 달린 성조기를 떼고 오라고 했다고 한다. 사실상 항복하고 오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레이니 대사로서는 상당히 불쾌했을 법하지만 내가 전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참았다고 들었다.
지금의 이재명 대통령을 보면 미국을 매우 능숙하게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용기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모셨던 YS가 이재명 대통령 정도의 외교 감각만 갖췄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조기를 떼고 오라는 건 외교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얘기를 듣고 YS를 도와주는 데 한계가 있겠구나 싶었다. 같이 일하려면 정치철학, 신념이 같아야 한다. 그럼에도 YS는 장점이 많은 지도자였다. 그는 머리보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정치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따뜻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를 통해 배웠다.
한 전 부총리(오른쪽)가 예종석 대기자에게 YS와 DJ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이영훈 기자)
△YS와 너무 달랐다. 정치에 늘 신중했다. 작아 보일 만큼 조심스러웠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교육부총리로 재직했다.
△DJ의 비서실장이던 한광옥 씨가 전화 한 통을 걸어왔다. 대통령이 교육부를 장관급에서 부총리급으로 격상해 공정한 경제체제를 뒷받침할 인재를 체계적으로 길러 낼 뜻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나를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경제부처와도 충분히 협의할 힘을 주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했음에도 교육 정책과 연계해 논의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교육부총리로 일하며 분명히 느낀 것은 교육은 수월성과 형평성이 함께 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모든 학생이 최상의 기준에 도달하도록 돕는 노력과 교육 기회의 공정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느 한 쪽도 제대로 구현하기 어려웠다. 나는 우선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정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학부모도, 교육 공무원도 교육에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이해를 얻지 못했다. 전교조는 여러 정책에서 강하게 반대했다.
한 번은 경제협력개밝구(OECD) 교육장관회의에서 즉석연설을 하며 이 같은 문제의식을 밝혔다. 당시 여러 나라 장관들이 공감을 표하며 속이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본과 덴마크, 핀란드 등 교육 선진국들 역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국 교육의 문제는 결코 고립된 특수 사례가 아니었다.
-인공지능(AI) 시대에서 대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AI는 효율성과 능률을 극대화하는 데에는 탁월하지만 공감과 연대, 따뜻함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독재의 도구가 되기 쉽다. 교육은 수월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참여의 폭을 넓혀야 한다. 효율성을 가르치면서도 효율성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이 늘어나지 않도록 막는 역할도 함께 감당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철학이 필요하다. 예수의 ‘인카네이션’(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로서 세상에 태어난 일)이나 동학의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이 상징하듯 인간 중심의 가치가 교육의 토대가 돼야 한다.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AI가 알 수 없는 가치를 가르치는 것, 그것이 미래 대학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통일부 장관 시절에는 북한 원로 정치인의 상징으로 꼽히는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사실 대구 경북고 출신이다. 북한 엘리트층에서도 보기 드문 이력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적십자 총재 자격으로 그를 열 차례 가량 만났다. 북한 적십자사가 협조적이지 않을 때는 “좀 야단을 쳐달라”고 격의 없이 말하기도 했다. 그를 통해 받은 인상은 매우 현명하고 신중하며 튀는 발언을 삼가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순응과 인내가 몸에 밴, 말하자면 참선이 잘된 사람 같았다.
-3대를 모신 인물 아닌가.
△나 역시 경북고 출신이다.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내가 자신보다 한참 후배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항상 조심스럽고 절제된 태도를 유지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일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 당시 실세로 통했던 장성택 등과도 접촉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지혜를 정책으로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한국 사회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 점이 지금도 아쉽다.
-적십자사 총재로서 남북교류에 깊이 관여했다. 앞으로의 남북관계 전망은.
△솔직히 말해 전망은 매우 어둡다. 분명한 기회가 있었지만 이를 놓쳤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정도는 남북의 의지만 있었다면 충분히 재개할 수 있었다.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은 ‘무지’이자 ‘안일함’이었다. 이런 기회를 한 번 놓치면 신뢰를 다시 쌓는 데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아쉬움이 큰 것 같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위원장을 맡아 정부종합청사에 갈 때면 주말마다 이른바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이 모여 대통령을 ‘좌파’라고 비난하며 고성을 지르는 모습을 봤다. 과거 같으면 일정한 대응이 있었을 텐데 그때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을 때 “왜 헌법이 보장하는 범위 안에서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의 권위조차 행사하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대통령은 특별한 답을 하지 않았다. 그때 이 정부가 히틀러 등장 이전인 1920년대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은 전통적으로 권위주의 문화가 강한 사회였지만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누구든 마음껏 말하도록 방치했다. 자유가 과도하게 넘쳤고 그에 염증을 느낀 중산층 지식인들이 결국 히틀러의 품으로 들어갔다. 히틀러는 쿠데타가 아니라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문 대통령에게도 “이 넘치는 자유의 공간을 극우 세력이 악용하면 우리 역시 전체주의로 흘러갈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헌법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극우 세력을 민주적으로 달래고 설득하며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됐다고 느꼈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아쉽다.
-진보 진영에도 한 말씀 하신다면.
△ 동양 사상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 민중운동을 하는 사람 중 일부는 이걸 잘못 이해한다. 예수는 십자가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행동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민중운동도 희생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지금의 정치 상황과 관련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재명 대통령이 이런 이야기들을 잘 읽고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힘을 얻었으면 한다. 동시에 극우 세력들도 이 이야기를 읽고 극우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한완상 전 부총리
△1936년 충남 당진 △경복고 △서울대 사회학과 학사 △미국 에모리대 대학원 정치사회학 박사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한국방송통신대 총장 △상지대 총장 △한성대 총장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한민족아리랑연합회 명예이사장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통일협회 고문 △서울대 명예교수 △2018년 남북정상회담 원로자문단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