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의 이별 문자처럼 보였지만, 보낸 이는 직속 상사인 P 팀장이었습니다. K 대리는 결국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부서로 발령이 났고, 그 충격으로 심각한 ‘상사 화병’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상사를 믿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믿고 싶었던 것에 가깝습니다.
이 장면은 지금 조직 곳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다만 상사의 얼굴 대신, 그 자리에 인공지능(AI)이 앉아 있을 뿐입니다. 요즘 리더들은 말합니다. “AI는 이제 믿고 써도 됩니다.” “AI가 사람보다 정확합니다.” “AI가 다 알아서 해줍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치명적인 혼동이 숨어 있습니다. AI를 믿는 것과 AI를 잘 활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점입니다. K 대리가 착각한 지점은 단순합니다. ‘호감’과 ‘신뢰’를 같은 것으로 여겼다는 점입니다. AI 시대의 리더들도 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AI가 빠르게 답을 주고, 그럴듯한 보고서를 만들어주고, 반박하지 않고, 지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판단까지 맡기려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합니다. 편리함은 신뢰의 근거가 아닙니다.
성과의 세계에서 호감과 신뢰는 늘 갈라집니다. AI도 예외가 아닙니다. 말투가 공손하다고, 표현이 정제돼 있다고, 답변이 빠르다고 해서 그 결론까지 옳은 것은 아닙니다. AI는 책임을 느끼지 않습니다. 후폭풍을 감당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주어진 데이터 안에서 가장 그럴듯한 답을 계산할 뿐입니다. 문제는 리더가 그 결과를 아무 검증 없이 ‘신뢰 서랍’에 넣어버릴 때 시작됩니다.
유능한 리더의 머릿속에는 여러 개의 서랍이 있습니다. 호감의 서랍이 있고, 신뢰의 서랍이 있습니다. 참고용 서랍이 있고, 결정용 서랍이 있습니다. AI 역시 이 분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어디에 넣느냐에 따라 조직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AI를 잘 쓰는 리더는 AI를 성과의 주체로 착각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과의 책임을 맡길 대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AI는 사고를 보조할 수는 있지만 판단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보고서를 작성할 수는 있으나 그 보고서로 인한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전략을 제안할 수는 있으나 그 전략이 실패했을 때 조직을 수습하지는 않습니다.
K 대리를 사지로 보낸 P 팀장도 아마 그를 좋아했을 것입니다. 술자리에서는 늘 곁에 두었고, 분위기를 띄우는 데는 그만한 인물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인사라는 결정의 순간, 그는 냉정해졌습니다. 즐거움을 주는 직원과 믿고 맡길 수 있는 직원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유능한 파트너처럼 보이다가도 리더의 결정까지는 해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AI 시대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는 AI에 대해 인간보다 더 엄격한 신뢰 기준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실수해도 사과할 수 있고, 맥락을 설명할 수 있으며,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틀리면 틀린 채로, 매우 그럴듯하게 틀립니다. 이 점이 가장 위험합니다.
이는 AI를 불신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AI를 제대로 쓰려면 쉽게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질문은 구조적으로 던져야 하고, 답변은 맥락 속에서 검증해야 하며, 최종 판단과 책임은 반드시 사람이 져야 합니다. 이것이 리더의 태도 OS입니다.
이 대목에서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대차무예(大車無較)’, 멍에를 고정시키는 쐐기가 없는 큰 수레를 뜻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수레라 해도, 그것을 끌 말이나 소와 연결할 쐐기가 없다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공자는 이를 두고, 신뢰를 얻지 못한 사람은 뜻을 펼치기 어렵다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나고, 속도가 빠르며, 그럴듯한 결과를 내놓는 기술이라 해도, 신뢰의 기준과 책임의 쐐기가 없다면 조직을 앞으로 끌고 갈 수는 없습니다. 기술이 크다고 해서 자동으로 리더십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수레를 끄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을 통제하고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이 결정의 책임은 누가 집니까.” 그 답이 여전히 ‘나’라면, AI는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입니다. AI 시대 리더십이란 결국 기술을 믿는 능력이 아니라, 신뢰를 어디까지 허용할지를 결정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