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만 와도 철렁"…일상 무너진 피해자들

사회

이데일리,

2026년 2월 12일, 오전 06:05

[이데일리 석지헌 기자] 70대 여성 A씨는 카드 배송을 빙자한 피싱 사기를 당한 후 일상이 무너졌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대화, 그리고 안내에 따라 문자로 발송된 링크를 누른 순간부터다. 결국 평생 모은 전 재산에 가까운 돈을 피싱범에게 건네고 말았다. 이후 A씨의 일상은 무너졌다. 매일 잠을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식욕을 잃어 식사량도 급격히 줄었다.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트라우마로 몸이 굳는 증상도 겪고 있다. 보이스피싱 이야기가 나오면 극도의 공포 반응을 보였다. 주변에선 상담을 권했지만 A씨는 “이 나이에 모르는 사람 앞에서 왜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하느냐”며 거부했다. 범죄 피해를 입은지 1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보이스피싱’이라는 단어는 A씨에게는 금기어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제작한 이미지.
경찰에 따르면 지난해 집계된 피싱 사기 건수만 5만 2000여건이다. A씨처럼 피싱 피해 이후 정신적인 후유증을 앓는 사람들이 수만명에 이른다는 의미다. 피싱 범죄 피해의 무서움은 경제적인 손실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붕괴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불안함을 넘어 ‘내가 사회에 피해를 끼쳤다’는 죄책감마저 들게 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태를 ‘심각한 심리적 외상’으로 분류한다.

이 같은 심리적 붕괴는 특정 사례나 연령에 국한하지 않는다. 소위 몸캠 피싱 범죄에 노출된 뒤 협박에 못 이겨 보이스피싱 조직의 운반책 역할까지 떠맡게 된 20대 남성 B씨 사례가 대표적이다.

B씨는 해당 사건을 겪은 후 극심한 불안과 만성 불면, 식사량 감소와 체중 저하, 지속적인 죄책감과 자존감 붕괴 증상을 보였다. 상담센터는 B씨의 법원 제출용 상담 소견서에서 “일상 기능 유지조차 어려운 상태”라며 “사법적 판단과 별도로 심리적 외상에 대한 치료적 개입이 시급하다”고 적시했다.

보이스피싱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상담센터인 인사이트케어의 장지연 센터장은 보이스피싱을 단순한 금융 범죄가 아닌 ‘심리 외상 사건’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 개인뿐 아니라 가족까지 함께 무너지는 구조인 만큼 피해 직후 심리 안정화 상담과 가족을 포함한 지원 체계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고 했다.

장 센터장은 “보이스피싱은 가족 전체가 함께 무너지는 사건”이라며 “가족이 어떤 말을 삼가야 하는지, 어떻게 지켜봐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가 함께 제공될 때 회복 속도가 눈에 띄게 달라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피싱 피해자를 위한 공적 심리 상담 창구는 부족한 상황이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만을 대상으로 한 사실상 유일한 프로그램은 민관 협력 방식으로 운영하는 ‘보이스피싱제로’다. 지원 규모는 월 200~300명 선착순에 그친다. 매달 수천명의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을 고려하면 심리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인원은 전체의 10% 남짓에 불과한 셈이다.

전문가들은 보이스피싱 대응이 예방과 수사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피해 직후 심리 안정화가 가능한 상담 연계, 피해자와 가족을 함께 아우르는 심리 지원, 수사 과정에서의 2차 피해를 최소화하는 제도적 장치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수 백석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피해자와 가족이 겪는 극심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 등 심리적 붕괴는 개인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며 “피해 직후 즉각적인 심리 치료와 상담 프로그램을 가동토록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의무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가해자를 검거했다면 경찰이 민사적 보상 조치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해 형사 처벌과 민사 보상이 동시에 이뤄질 수 있도록 경찰의 의무를 확대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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