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 스님은 1970년 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경주 분황사에서 동헌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동국대 동문인 그는 1989년 일본 불교대학교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했고, 이듬해인 1990년 동국대 조교수로 임용돼 강단에 섰다. 이후 교수 재직 기간 동안 16년간 교무위원을 지내며 대학 행정과 학사 운영 전반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동국대 총장 재직 시절을 회상하며 “워낙 힘든 시기였다”며 “그동안 암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아야 했다”고 털어놨다.(사진=김태형 기자)
보광(普光) 스님(76)은 “마음공부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우리는 자기 마음을 제대로 챙겨본 적이 거의 없다”며 “자기 자신에게 무심하다 보면 섭섭함이 쌓이고 그 감정이 어느 순간 불만이 되어 밖으로 튀어나온다”고 했다. 이어 “주관적인 자아가 객관적인 자아에게 한 번도 안부를 묻지 않고 살아온 경우가 너무 많다”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바로 마음 챙김”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하루에 몇 번이라도 자기 이름을 불러보라고 권했다. 보광스님은 “아침에 눈을 뜨면 ‘보광아, 사랑한다. 잘 잤나. 오늘도 잘 지내자’ 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며 “주관적인 자아와 객관적인 자아가 서로 안부를 묻기 시작할 때, 비로소 마음공부가 시작된다”고 전했다.
동국대 총장을 지낸 보광 스님은 학자이자 교육자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현재는 성남 정토사 주지스팀으로 있으면서 템플스테이를 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청소년기는 남달랐다.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교 시절 출가했다. 삶의 전환점마다 선택의 무게를 감내한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출가하게 된 계기는.
△은사이신 도암스님이 경주 분황사 주지스님이었다. 분황사가 경주고에서 400m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가까웠다. 고교 때 불교 관련 동아리가 있었는데 그때 스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시절 출가자가 많았다고 들었다.
△법신스님, 월암스님, 학담스님, 정토회의 법륜스님까지 합해 약 20여명 정도가 출가했다. 당시 불교계가 시끄러울 때였는데 ‘불교를 바르게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컸다.
-개인적으로는 언제부터 출가를 생각했나.
△어릴 때부터였다. 초등학교 때 장래희망으로 ‘스님’이라고 적었을 정도다.
-집안이 불교였나.
△아니다. 유교였다. 전생부터 타고난 인연때문이다. 내 고향이 불국사를 건립한 김대성의 고향이기도 하다.
-한국 불교학계 최초로 정토학(淨土學) 박사 학위를 취득한 대승불교, 정토학 분야의 권위자다. 정토학이란 무엇인가.
△불교에는 여러 학문이 있지만 정토학은 신앙을 중심에 둔 불교다. 불교는 수행을 중시하다 보니 신앙의 문제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종교는 신앙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다. 정토학은 한마디로 불교의 내세학이다. 죽은 뒤 극락세계에 간다는 믿음이다.
-기독교의 세계관과 비교된다.
△기독교는 죽은 뒤 천국에 간다고 하지만 성경에는 그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반면 불교의 극락세계는 반드시 존재하며 그 세계에 대한 설명도 매우 구체적이다.
-한국 불교에서 정토학의 뿌리는.
△대표적인 분이 원효대사다. 원효대사는 생애 동안 100여부·24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 중 정토 관련 저술이 9부·10여권이나 된다. 중국과 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그 전통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정토종의 최고 본산이 있는 교토로 유학을 가 정토학을 공부했다.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일본 선학계의 석학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 교수 밑에서 선학(禪學,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학문)도 함께 연구했다.
-정토와 선학의 차이는.
△정토는 타력신앙이다. 내 힘만으로는 성불(成佛)이 어렵기때문에 부처님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정토의 목표는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다. 반면 선학은 자력신앙이다. 스스로 깨달아 부처의 마음을 보는 것이 목표다.
-불교를 믿는다는 건 결국 평생 부처님을 만나기 위한 길을 걷는 건가.
△기독교인이 하나님(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이라고 부름)을 만나는 것을 최고의 신앙 목표로 삼듯 불교도 마찬가지다. 부처님을 만나는 방법이 있고 그 수행을 안내한 경전이 ‘반주삼매경’ 같은 책이다. 하지만 만남 자체보다 중요한 건 만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다. 테레사 수녀는 평생 하느님을 만나고 음성을 듣고 싶어 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다고 일기에 남겼다. 그렇다고 그 신앙이 헛된 건 아니다. 만나기 위해 평생 노력한 그 과정이 바로 신앙이다. 불교도 부처님을 만나기 위한 수행 과정에서 도가 닦이는 거다.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를 수 있지만 부처님은 성인이기에 몸과 마음이 하나다. 그래서 꿈속에서도, 염불 중에도 만날 수 있고 때로는 거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때 비로소 모든 사람을 부처로 보는 눈이 열린다.
-정토신앙의 핵심은.
△우리가 성불을 말하면서 사회를 외면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정토는 사회 현실 속에서 살아가면서 성불을 이야기한다. 개인의 깨달음에 머무르지 않고 삶과 사회 속에서 부처를 만나는 길을 제시한다. 그래서 정토에서 나오는 논리는 상당 부분 기독교의 논리와도 맞닿아 있다.
-정토사상이 기독교에 영향을 준 건가.
△불교는 기독교가 생기기 훨씬 전 인더스강 유역 간다라 지역에서 형성됐고 그 과정에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정토 세계의 전경은 성경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어떤 점에서는 성경보다 더 파격적이고 이상적이기도 하다.
보광스님의 대학 총장 도전은 순탄치 않았다. 세 차례 고배를 마신 끝에 네 번째 도전에서야 총장에 선출됐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학교는 재단 중심 구조로 운영돼 총장의 권한은 제한적인 반면 이사회의 영향력은 지나치게 컸다”고 말했다. 특히 ‘신정아 사건’ 당시 불교대학 교수회 대표로서 재단의 잘못된 결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정면으로 맞섰고 이 과정에서 재단과 큰 충돌을 겪었다. 이 사건은 이후 이사회 교체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총장 취임 후 그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는 재정 정상화였다. 당시 학교에는 650억원이 넘는 부채가 쌓여 있었는데, 사립대학으로서는 위험 수위였다. 그는 무리한 건물 신축으로 빚을 늘리고 평가 지표만 맞추던 전임 운영 방식을 바로잡았다. “더 이상 건물은 짓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4년 동안 약 600억원의 부채를 상환했다. 이러한 재정 체질 개선 덕분에 이후 닥친 코로나 위기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넘길 수 있었다고 그는 설명했다.(사진=김태형 기자)
△도겐(道元)스님은 중국 송나라로 유학해 수행한 뒤 그 경험과 사유를 ‘정법안장’에 담았다. 한문도 현대 일본어도 아닌 일본 고어로 쓰인 이 책은 미완에 그쳤지만 이후 전 세계 선학의 핵심 텍스트가 됐다. 송나라 시대 선 수행의 실제, 즉 ‘마음공부를 어떻게 했는가’가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책을 높이 평가한 성철스님은 제자들에게 일본어를 배우게 하며 ‘정법안장’을 공부하게 했다. 일본 유학 시절 기존 한국어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직접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대학원 수업 교재로 삼아 학생들과 함께 번역을 시작했다. 가타카나와 히라가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해 12권을 옮기는 데 30년이 걸렸다. 작업은 2021년에 마무리됐다.
-대단한 업적이다. 원효사상의 대가로도 알려졌는데.
△원효 사상의 중심은 ‘일심’(一心)이다. 마음은 하나지만 그 안에는 두 갈래가 있다. 성인과 같은 깨끗한 마음과 번뇌에 물든 중생의 마음이다. 누구에게나 이 두 마음이 함께 존재한다. 원효는 특히 중생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봤다. 수행은 이상적인 성인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번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원효는 마음을 체(體)·상(相)·용(用)으로 설명했다. ‘체’는 근본 마음, ‘상’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 ‘용’은 그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다. 컵을 예로 들면 ‘체’는 흙이고 ‘상’은 컵의 모양, ‘용’은 물을 마시는 기능이다. 인간의 마음도 같다. 아무리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도 근본 마음은 훌륭하다.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도 자기 집 강아지는 애지중지하지 않나. 사람을 볼 때는 지금 드러난 모습(상)만이 아니라 근본(체)을 봐야 한다. 그래야 회개의 가능성도, 변화의 가능성도 보인다. 나쁜 행동은 분명히 다뤄야 하지만 영원히 배제해서는 안 된다. 에너지가 과잉된 사람은 육체노동처럼 그 에너지를 바르게 쓰도록 해야 한다. ‘용’은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다.
-왜 원효 사상이 지금도 중요한가.
△초기 불교는 사회성을 충분히 담지 못했다. 모두가 출가하면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이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 대승불교이고 원효 사상이다. 하지 말라는 가르침에서 하라는 가르침으로 나아갔다. 보시하고 참아내고 함께 살아가는 불교다. 원효 사상은 인간, 사회, 신앙, 수행을 하나로 묶은 위대한 사상이다.
모든 수행과 사상의 귀결은 여섯 글자, 나무아미타불이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이고, ‘아미타’는 한계가 없다는 의미다. 무한한 빛(무량광)과 무한한 생명(무량수)의 부처가 아미타불이다.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도 아미타불이다. 김대성은 전생의 어머니를 위해 석굴암을, 현생의 어머니를 위해 불국사를 지었다. 석굴암이 서쪽을 향한 것도 서방정토를 상징한다.
원효는 수행을 통해 완전히 깨닫지 못하더라도 정토에 왕생해 공덕이 이어진다고 봤다. 원효 사상은 인간의 마음, 사회의 질서, 신앙의 방향을 하나의 사상으로 묶은 종합적 불교철학이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이다.
-원효의 일심사상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주는 의미는.
△원효의 일심사상은 단순한 불교 교리가 아니라 위기의 순간마다 한국 사회를 지탱한 사유의 뿌리다. 신라는 황룡사 9층탑을 세우며 외적을 물리치겠다는 뜻을 담았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이름은 굳이 적지 않았다. 언젠가는 하나가 될 존재라고 봤기 때문이다. ‘적은 미워하되 백성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정신이었다. 이 시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탈북자를 바라보는 문제만 해도 그렇다. 그들의 고통은 개인의 죄가 아니라 정치와 체제의 결과다. 신라가 삼국을 형제로 보았듯 분단의 책임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다름을 인정하고 보듬는 것, 그것이 원효가 말한 하나의 마음이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위기 때마다 이 사상은 다른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고려 몽골 침입기에는 보조국사가 ‘진심직설’로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끝까지 저항했다.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유심’으로 온 나라를 하나로 묶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만해 한용운이 ‘님’이라는 말로 민족의 마음을 일깨웠다. 표현은 달랐지만 근본은 모두 일심이었다.
서로 갈라져 싸우다가도 외환위기 때 국민이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선 힘, 그 저력 역시 같은 맥락이다. 우리 국민의 사고방식 깊은 곳에는 원효의 일심사상이 흐르고 있다. 오늘날 통일과 사회 갈등의 문제도 결국은 일심, 일념의 문제다. 하나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 길이 열린다. 원효의 일심사상이 지금 시대에는 ‘일념 사상’으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종교의 정치 개입에 대한 견해는.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그 자유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법적 테두리는 우리나라에 거의 없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만 문제를 제기해도 곧바로 ‘종교 탄압’이라는 말이 나오고 사법기관도 손을 못 대는 상황이 반복된다. 사실 대통령이 종교단체 해산을 언급한 것도 법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우리나라에는 ‘종교법인법’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다르다. 메이지 시대에 종교법인법을 만들어 종교단체의 법적 지위를 명확히 했다. 그래서 옴진리교 같은 경우도 법에 따라 해산시키고 교주를 처벌할 수 있었다. 일본의 종교법인법은 두 축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교리·진리처럼 국가가 개입할 수 없는 정성적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재산·회계·과세 같은 정량적 영역이다. 국가가 개입하는 건 오직 후자다. 한국은 이 기준 자체가 없다. 의료법인, 학교법인은 다 있는데 종교법인만 없는 이상한 구조다. 그래서 지금은 종교단체가 비영리 재단이나 사단법인 형태로만 등록돼 있고 종교에 관한 규정은 사실상 공백 상태다. 이대로 가면 가장 큰 탈세 사각지대가 종교단체가 될 수밖에 없다. 현금 거래가 집중되는 곳이 바로 종교단체이기 때문이다. 불교 사찰은 카드 결제, 온라인 결제를 도입했고 자산도 종단이 관리한다. 개인이 마음대로 사고팔 수 없게 돼 있다. 하지만 교회는 헌금 중심의 현금 구조가 많고 관등록만 해놓고 사실상 개인 재산처럼 운영되는 종교 시설도 적지 않다. 이 경우 세금은 면제되고 재산은 사적으로 이전된다. 그래서 절이나 교회를 사고파는 일까지 벌어진다.
종교법인법은 종교를 통제하기 위한 법이 아니다. 최소한의 테두리를 만들어 투명성을 확보하자는 거다. 천주교와 불교는 이미 이에 동의하고 있다. 그동안 기독교의 강한 반대로 논의가 막혀 왔지만 이제는 더 미룰 문제가 아니다.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종교법인법은 반드시 필요하다.
-조계종 종단 원로회 의원이 되셨다. 앞으로의 계획은.
△종단 원로회는 25명으로 구성된 종단 최고의 의결기구다. 그만큼 책임도 무겁다. 요즘 원로들이 가장 깊이 고민하는 것은 한국불교가 사회에 무엇을 더 기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종교 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에 젊은 세대가 어떻게 불교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느냐는 문제다. 그런 점에서 템플스테이는 분명한 희망이다. 젊은 층의 참여도 많고 만족도 역시 매우 높다. 최근 총무원장이 불교를 좀 더 ‘핫하게’ 만들자며 이른바 ‘뉴진스님’ 같은 시도를 한 것도 종단으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젊어지기 위해 변화를 감수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사례라고 본다.
또 하나 중요한 흐름은 선명상이다. 이는 젊은 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허하고 지친 현대인 모두에게 필요한 수행이다. 불교 공간이 찾아와 말없이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이 가라앉고 추슬러지는 쉼터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 사찰 역시 이런 흐름 속에서 갤러리 콘셉트로 운영하고 있다. 법당 자체를 갤러리처럼 구성했다. 후불탱화와 신중탱화도 전통 불화 작가가 아닌 유명 서양화가의 작품으로 채웠다. 1000호에 달하는 대작이다. 복도 공간 역시 갤러리로 활용하고 사찰 외부는 박물관처럼 조성했다. 잠시 의자에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공간, 공감과 위로를 건네는 공간…이런 변화들이 결국 젊은 세대와 사회 전체가 다시 불교로 다가오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보광 스님이 동국대 총장 재직 시절 가장 힘을 쏟은 과제는 학교 체질 개선이었다. 그는 “형식만 유지되는 대학으로는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100년 넘게 이어져 온 교훈부터 손봤다. 1년간의 전면 공모를 거쳐 교훈을 ‘지혜·자비·정진’으로 바꾸고, 학교 운영과 교육 체계를 이에 맞게 재정비했다. 변화의 핵심은 학과 커리큘럼 개편이었다. 학생 이탈이 심했던 일문과는 일본어·일본문화·일본경제를 아우르는 일본 취업 중심 학과로 탈바꿈시켰다. 법학과에는 탐정학과를 신설해 새로운 수요를 끌어냈고, 경찰행정학과는 단과대학으로 격상해 과학수사·범죄심리 등 실무 중심 교육을 강화했다. 보광 스님은 “눈에 띄는 성과보다 대학이 살아남기 위해 꼭 해야 할 일을 했다”며 “소소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변화였다”고 돌아봤다.(사진=김태형 기자)
△1950년 경주 △경주고 △동국대 △1970년 출가△일본 북교대 문학박사 △대각사상연구원장 △2015년 동국대 총장△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 이사장 △호계원장 △현 정토사 주지 △현 조계종 원로의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