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B급영화가 그린 '물 권력'…사막의 생명줄, 볼모가 되다 [황덕현의 기후 한 편]

사회

뉴스1,

2026년 3월 28일, 오전 07:30

영화 '탱크 걸'(Tank Girl) © 뉴스1

낮 기온이 25도 안팎까지 오르는 포근한 봄 날씨는 반갑지만, 무더울 여름까지 함께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계절이 더 빠르게 기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상청·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현재 90일가량인 봄의 길이가 21세기 말엔 80~87일로 줄고, 여름은 40~72일 늘어날 것으로 봤다. 지금 봄은 미래의 여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강릉 가뭄' 등 전국 곳곳의 마른 날씨는 물이 더 이상 당연한 자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생활 속에서 체감한 위기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기후가 바뀌면 무엇이 가장 먼저 부족해지는지를 드러낸 사례였다. '물을 왜 돈 주고 사먹냐'는 게 십수 년 전 화두였는데, 그런 갈등이 무색한 것이다.

지금 중동에선 그게 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갈등은 석유를 넘어 물 문제로 확장되는 양상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 이란의 맞대응 속에서 에너지 시설뿐 아니라 해수담수화 시설까지 공격 대상에 오르며, 여러 중동 국가의 생명선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카타르와 쿠웨이트는 식수의 90% 이상, 사우디아라비아도 약 70%를 해수 담수화에 의존한다. 이 시설이 멈추는 순간, 도시의 기능도 함께 멈춘다.

해수담수화시설은 흔히 '사막의 축복'으로 불린다. 아부다비와 두바이 같은 도시는 이 시설 없이는 존재하기 어려웠다. 바닷물을 끌어 올려 마실 물로 바꾸는 기술은 도시를 세웠지만, 동시에 그 도시를 특정 시설에 묶어두는 구조도 만들었다. 물을 만드는 기술이 곧 생존을 쥔 장치가 된 셈이다.

물이 권력의 상징이자 갈등의 씨앗이 된다는 설정은 오래전 영화 '탱크 걸'(Tank Girl)에서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셜록'과 '닥터 후' 등의 연출로 유명한 레이철 탈라레이 감독은 배우 맬컴 맥도웰과 나오미 와츠, 음악가 아이스티(Ice-T), 비요크(Bjork) 등을 이끌어 가뭄으로 황폐해진 미래를 배경으로, '워터 앤드 파워'(Water and Power)라는 기업이 물을 독점하며 사회를 지배하는 모습을 그렸다. 물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통제 대상이 되고, 사람들은 물을 얻기 위해 권력에 종속된다.

영화 속 설정은 과장된 상상처럼 보였지만, 지금 현실은 그 구조를 점점 닮아가고 있다. 담수화 시설이 공격 대상이 되고, 물 공급이 군사적 협상의 카드로 등장하는 순간, 물은 자원이 아니라 전략 자산이 된다. 특정 시설 하나가 도시 전체의 생존을 좌우하는 구조는, 권력이 물을 통해 행사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흐름은 기후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폭염과 가뭄이 반복될수록 물 수요는 늘고, 공급은 더 불안정해진다. 한국 역시 올여름 '폭염 중대경보'를 신설할 정도로 더위의 강도가 달라지고 있다. 더위는 단순한 계절 현상이 아니라 물 수요와 전력 수요를 동시에 끌어올리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결국 지금 벌어지는 갈등은 석유와 가스를 둘러싼 전쟁이면서, 동시에 물을 둘러싼 미래 갈등의 전조이기도 하다. 에너지와 물이 동시에 전략 자원이 되는 구조 속에서, 한쪽의 충격은 곧 다른 쪽의 위기로 이어진다.

30년 전 B급 액션영화가 그려낸 세계는 허구였지만, 그 안의 구조는 지금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에너지와 물이 권력이 되는 순간, 갈등은 자원을 둘러싼 경쟁을 넘어 생존을 건 문제로 바뀐다.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 미래가 생각보다 가까워졌다는 신호일 수 있다.

황덕현 경제부 기후환경전문기자 © 뉴스1


ac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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