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서 벗어나 간호조무사로…'경계선 미혼모'의 인생 2막

사회

뉴스1,

2026년 5월 10일, 오전 07:00

© 뉴스1 김초희 디자이너

가희(가명) 씨는 열여덟 나이에 엄마가 됐다. 육상에 재능이 있었지만 빠듯한 형편과 출산, 남편의 폭력은 홀로 넘기 힘든 허들이었다. 남편의 손찌검을 피해 도망친 미혼모 지원 단체에서 그는 예상조차 하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됐다.

단체가 실시한 종합심리 검사 결과, 가희 씨는 경계선 지능인 진단을 받았다. '느린 학습자'라는 이름으로도 통하는 경계선 지능인은 통상적으로 71~84 사이의 지능지수(IQ)를 보인다.

법률상 장애인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새로운 개념을 학습하고 응용하는 데 일반인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거나 추론, 멀티태스킹에 어려움을 느낀다.

"저는 못 받아들이겠어요." 가희 씨는 자신이 경계선 지능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2차 검사에서도 같은 진단이 나오자 그때서야 납득했다. 가희 씨가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생활하고 홀로 설지 익히기 시작한 출발선이었다.

단체 거쳐 간 미혼모의 40%는 경계선지능인
1년에 미혼모 가정 150~200가구와 접촉하는 사단법인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KUMSN)에 따르면 이들이 지원하는 미혼모의 약 40%가 경계선 지능인이다. 20대 미혼모만 보면 그 비율이 80%까지 높아진다.

젊은 경계선 지능인 미혼모 비율이 높은 이유는 상대적으로 정보 접근 능력이나 상황 대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유미숙 KUMSN 부대표는 "경계선 지능인 엄마나 지적장애가 있는 엄마들은 (임신에 대한) 대처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옆에서 피임 등 기본적 성 지식과 임신중지 가능 여부, 출산 과정에 관해 설명해 줄 조력자가 없는 이상 이들은 '계획에 없던 출산'을 벼락처럼 맞이할 공산이 크다. 경계선 지능인 미혼모 중 병원 밖 출산이나 청소년기 이른 출산 사례가 종종 보고되는 까닭이다.

16세에 아이를 낳은 나경 씨(가명)는 한 살 많은 남성과 동거 하던 중 병원 밖에서 달도 다 채우지 못한 상태로 출산해야 했다. 나경 씨도 단체에 들어오고 나서야 경계선 지능인임을 알게 됐다.

다정 씨(가명)는 한참 성장기였을 13세에 이미 한 차례 출산을 경험했다. 성착취에 의한 임신이었다. 성인이 된 후에는 교제 폭력에 시달렸고 직장에서는 '일 처리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각종 트라우마는 이 세 사람 만의 공통점이 아니다. 정선영 한경국립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의 연구(2023년)에 따르면 경계선 지능인 사례자 214명의 약 70%는 정신 외상사건을 경험하거나 정신건강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정신 외상사건 중에서는 중복 응답을 포함해 집단 따돌림 경험자가 46.7%로 가장 많았고 △가족 내 폭력(20.6%) △신체적 폭력(10.3%) △성폭력(7.5%) 등이 보고됐다. 정신건강 문제로는 △충동적 행동(46.7%) △불안(35%) △우울(33.2%) △분노 폭발(19.6%) △피해 사고(16.4%) △자살 생각 및 시도(5.6%) △자해(5.1%) 등이 있었다.

정 교수는 지난 1월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경계선 지능인을 사회적 취약계층으로 공식화할 수 있는 제도적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느리더라도 인생 2막 올리는 엄마들
경계선 지능인 엄마에게 자립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돼 사회와의 연결점을 만드는 것은 이들의 생존·건강과 직결되고 남들보다 더디게 배울 뿐 목표를 이뤄낼 수 있는 잠재력은 부족하지 않다는 게 유 부대표의 설명이다.

가희 씨는 미혼모 지원 단체가 제공하는 임시 거처에서 간호조무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거쳐 올해 시험에 합격했다. 거처 입주 초기만 해도 단체 직원에게 밤낮 가리지 않고 전화를 거는 등 일반적 규범조차 낯선 그였지만 이제는 병원의 일원이 됐다.

나경 씨는 단체가 제공한 2개월간의 밀착 과외를 받고 검정고시를 통과했으며 가희 씨와 같은 간호조무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지능검사에서 지적 장애인에 가까운 수치가 나온 다정 씨는 피부관리사 시험에 합격해 현재 피부과 병원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으며, 한때 연이 끊어졌던 다정 씨의 원가족과의 유대도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성장과 자립 과정을 지켜본 유 부대표는 "경계선 지능인 미혼모를 돕는 일이 곧 가족 공동체의 재결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석재은 한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경계선 지능인 부모가 사회 안전망의 개입 없이 고립될 경우 아이 세대도 같은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 기본적으로 지능은 유전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경계선 지능인의 경우는 조기 개입과 의사소통·사회성 훈련을 통해 좋아질 수 있는 범위에 있다"며 "미혼모로서 (이미) 여러 핸디캡이 있는 상황에서 경계선 지능인으로서의 특성이 약점으로 작용한다면 사회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realkwon@news1.kr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