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별 교섭의 명암[김덕호의 갈등사회]

사회

이데일리,

2026년 5월 12일, 오전 05:00

[김덕호 성균관대 교수] 한 나라 안에 두 개의 노동시장이 존재한다. 같은 산업의 울타리 안에 있지만 한쪽은 노동쟁의를 통해 더 높은 임금과 복지를 요구하고 다른 한쪽은 납품 단가 압박 속에서 고용 불안을 견뎌야 한다.

최근 삼성전자 노조의 파업 움직임은 한국 노동시장의 구조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대기업 노조는 오랫동안 노동조건 개선과 고용 안정을 이끌어 왔다. 그 성과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교섭의 결과가 기업 담장 밖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있다.

기업별 교섭은 내부를 지키는 데 강하지만 산업 전체를 지키는 데는 취약하다. 대기업 노사의 교섭 결과는 납품단가 인하나 외주 확대의 형태로 외부에 전가되기 쉽다. 그 과정에서 협력업체의 임금 여력은 줄어들고 신규 채용은 위축된다. 이중구조는 이 흐름 속에서 굳어져 왔다.

조선업은 그 단면을 보여준다. 호황기에는 원청 중심으로 성과를 분배했지만 불황기에는 하청 업체와 비정규직이 먼저 충격을 떠안았다. 협력업체들은 무너졌고 숙련 노동자는 현장을 떠났다. 청년들은 조선소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지금 조선업은 “사람이 없어 배를 못 만든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인력난을 겪고 있다.

단순한 인력 부족이 아니다. 숙련의 단절이다. 기업별 교섭은 원청 내부의 임금과 고용을 지켜냈을지 모르지만 산업 전체의 숙련 축적 구조까지 지켜내지는 못했다. 하청 생태계가 무너지고 청년 유입이 끊기면 산업 경쟁력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

청년들이 대기업 정규직 시험에 몰리는 이유도 단순히 높은 임금 때문만은 아니다. 한 번 성벽 안으로 들어가면 보호받고 밖에 남으면 불안과 위험을 감당해야 한다는 현실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정 노조법 시행 이후 원·하청 교섭 요구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현재처럼 기업별 교섭 체계 위에 개별 원·하청 교섭이 산발적으로 중첩되기 시작하면 산업 현장은 훨씬 복잡한 갈등 구조로 빠져들 수 있다.

원·하청 노조와 사용자 측 이해관계가 충돌하기 시작하면 교섭은 조정보다 충돌의 장으로 변질할 위험이 커진다. 원청 책임의 법적 확대만으로는 산업 생태계 전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어렵다. 법적 강제만이 아니라 산업 차원의 자발적 조정과 타협이 필요하다. 아울러 불법에 대한 책임의 범위와 교섭 질서도 함께 설계해야 한다.

물론 유럽식 산별교섭을 그대로 이식할 순 없다. 기업 간 생산성 격차가 크고 노사 단체의 조정 기반도 취약하다. 노조 역시 기업별 이해관계에 익숙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기업별 교섭 체계 위에 원·하청 교섭만 계속 덧붙는 구조 역시 지속 가능하지 않다. 연대 의식이 없으면 갈등은 더 잦아지고 책임은 더 불분명해질 뿐이다.

이제 우리도 교섭 단위를 다시 고민해야 한다. 대기업과 협력업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해관계를 산업 차원에서 함께 조정하자는 이야기다.

임금뿐 아니라 납품 구조, 숙련 체계, 안전 기준, 청년 고용까지 산업 생태계 전체를 함께 설계하자는 것이다. 업종별 표준협약, 공동 임금 가이드라인, 원·하청 공동 의제, 공동 숙련체계 등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인공지능(AI) 전환은 질문을 더한다. 자동화와 AI는 숙련 구조 자체를 빠르게 바꾸고 있다. 앞으로 갈등은 단순한 임금 배분을 넘어 전환의 기회와 비용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로 이동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개별 기업만의 교섭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한국 노동시장의 문제는 임금 격차만이 아니다. 함께 일하지만 서로 다른 규칙 속에 살아가는 구조적 단절이 더 문제다. 지금처럼 기업별 교섭이 내부 보호만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이중구조는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 파업은 단지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노사관계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다. 이제 노사는 기업의 담장을 넘어 산업 전체의 지도를 함께 그려야 한다. 그것이 노동과 산업이 함께 살아남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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