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아들과, 오늘은 손자와 왔죠"…광화문·여의도 '붉은 물결'

사회

이데일리,

2026년 6월 12일, 오전 10:41

[이데일리 석지헌 염정인 기자] “2002년엔 아들과 함께 왔고, 이번엔 손자와 왔습니다.”

12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 손흥민 유니폼을 입은 김광훈(70) 씨가 초등학교 5학년 손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돗자리 위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경기 시작을 기다리며 승부를 예측했다. 손자는 “2대 0”, 할아버지는 “2대 1”을 외쳤다.

김 씨에게 광화문은 특별한 장소다. 24년 전 한일 월드컵 당시 이곳에서 아들과 함께 한국의 4강 신화를 지켜봤다. 그 기억을 이번에는 손자와 나누고 싶어 광장을 찾았다. 손자는 이날 체험학습을 신청하고 학교 대신 응원 현장을 택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시민들이 모여 체코전 거리 응원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정유진 수습기자)
2026 북중미 월드컵 한국 대표팀의 조별리그 첫 경기인 체코전을 앞두고 서울 광화문광장과 여의도 일대가 붉은 물결로 뒤덮였다. 출근 시간대인 오전 11시 킥오프에도 시민들은 새벽부터 자리를 잡으며 응원 열기를 달궜다.

대한축구협회와 KT, 붉은악마가 공동 주최한 광화문 응원전에는 오전 9시 기준 메인 응원석에만 750명(경찰 측 추산)이 모였다. 오전 9시 44분께 세종대왕 동상 앞 A-3 구역은 557명이 들어차 통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주최 측은 최대 6000명이 찾을 것으로 예상했다.

광장 곳곳에서는 응원 준비가 한창이었다. 오전 9시 7분 메인 무대에서 사전 공연이 시작되자 시민들은 태극기와 ‘우리 모두 다 같이 승리를’이라고 적힌 피켓을 흔들며 환호했다.

이어진 밴드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만 공연 시작 2분 만에 앞쪽 관객 일부가 넘어지면서 경찰이 현장 통제에 나섰고 공연은 잠시 중단됐다. 관객들이 다시 착석한 뒤 공연이 재개됐고 아이돌 그룹 코르티스가 등장하자 광장은 다시 함성으로 가득 찼다.

12일 오전 서울 광화문 거리응원 현장에서 시민들이 공연을 즐기고 있다. (사진= 강민혁 수습기자)
이날 응원 열기는 새벽부터 시작됐다. 직장 동료인 정소영(53) 씨와 이동수(56) 씨는 오전 6시 30분 광장에 도착했다. 이 씨는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났다”며 “2002년 월드컵 때는 캐나다에 있어서 혼자 TV로 봤는데 이번엔 꼭 현장에서 응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 씨는 “회사에 휴직을 냈다. 이거 알면 안 되는데”라며 웃었다. 두 사람은 좋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붉은악마 티셔츠를 맞춰 입은 김한준(30) 씨는 축구 팬들과 단체로 광장을 찾았다. 김 씨는 “케이리그부터 A매치까지 함께 응원하는 모임 사람들이 50~60명 정도 왔다”며 “현지에 가진 못하더라도 서울의 상징적인 공간에서 대표팀을 응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도 응원객들이 몰려들었다. 경북 경산에서 전날 상경한 조경제(47) 씨는 아내와 세 아들의 손을 잡고 광장을 찾았다. 거리 응원은 처음이다. 조 씨는 “4년에 한 번뿐인 월드컵 열기를 아이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며 “날씨는 덥지만 설레는 마음이 더 크다”고 말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이광연(42) 씨 역시 두 아들과 함께 응원전에 참가했다. 세 사람은 같은 유니폼을 맞춰 입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경기 시작을 기다렸다. 이 씨는 “2002년 당시 고3이었는데 거리 응원 열기가 아직도 생생하다”며 “이번에도 4강까지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 국적 미국 유학생 김태협(17) 군과 복수국적자 김태민(17) 군도 처음으로 거리 응원에 나섰다. 김태협 군은 “뉴욕에서 NBA 경기를 응원할 때보다 규모는 작지만 훨씬 특별한 분위기”라며 “인생을 건다는 손흥민 선수가 가장 기대된다”고 말했다.

시험 기간도 월드컵 열기를 막지는 못했다. 대학생 이모(20대) 씨와 최모(20대) 씨는 “시험보다 월드컵이 먼저”라며 웃었다. 최 씨는 한국의 3대 0 승리를 자신했다.

◇직장인·축구팬 몰린 여의도… 응원 열기 ‘후끈’

여의도 응원전도 뜨겁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투자증권 본사 앞에는 선착순 450석 규모의 좌석이 마련됐다. 주최 측은 스탠딩 관람객까지 포함해 최대 1000여 명이 찾을 것으로 전망했다. 기업들이 경기 시작 시간인 오전 11시에 맞춰 점심시간을 조정하면서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의 발걸음도 이어졌다.

서울 여의도 거리 응원 현장에 나온 시민들 모습. (사진= 염정인 기자)
전날부터 만반의 준비를 마친 응원객도 있었다. 축구공 모양 의상을 입은 이시우(35) 씨는 청주에서 올라와 인근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친구 김재훈(29) 씨는 얼굴 전체에 페이스 페인팅을 했다. 두 사람이 응원 분장에 쓴 비용만 25만원이다.

김 씨는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때도 거리 응원에 나갔는데 16강 진출 순간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며 “첫 경기인 만큼 꼭 승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니폼을 맞춰 입은 김재원·임도훈·홍현우 씨도 여의도를 찾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친구인 세 사람은 경기 시작 전부터 응원가를 따라 부르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홍 씨는 “패배는 상상도 안 한다. 오현규 선수가 골을 넣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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