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선거 구호에 성조기까지"…개표소 시위 현장 떠나는 2030

사회

이데일리,

2026년 6월 22일, 오전 05:56



[이데일리 김현재 기자 권아인 강민혁 수습기자] 서울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에 위치한 한 중소기업에 재직 중인 김선희(27·가명) 씨는 복잡한 일을 싫어한다. 그에게 한국 정치는 ‘소음’에 불과했다. 김씨는 “그래도 투표는 꼬박꼬박했다”고 했다. 선거 직전 후보들의 토론회나 공약집을 훑어보는 건 김씨가 주권자로서 했던 최소한의 도리였다.

지난 3일 투표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고 맥주 한 캔을 들이키려던 김씨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알게 됐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김 씨의 상식으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면 끝날 해프닝으로 여겼지만 오산이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줄곧 머릿속을 맴돌았다.

선거 3일 후인 지난 6일 밤 김씨는 개표소였던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으로 가 목이 터져라 ‘재선거’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그는 더는 시위 현장을 찾지 않는다. 김씨는 “극단적인 주장이 난무하는 정치 집회로 변질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고 했다. 지난 13일 개표소 시위 현장을 방문했던 김씨는 성조기가 나부끼고 ‘부정선거’ 구호가 난무하는 현장을 보고 1시간만에 발길을 돌렸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계기로 촉발된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가 17일째 이어지고 있다. 참정권 침해와 절차적 공정의 붕괴에 분노하며 합리적 분노를 표출했던 2030청년들은 시위 현장을 떠났다. 그 빈자리는 중·장년층과 부정선거론자들이 채웠다.

이데일리는 혼란의 광장을 떠난 2030 청년 3명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들이 광장을 떠난 이유는 대체로 비슷했다. 광장이 특정 정치세력에 의해 장악됐을 뿐만 아니라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일방적인 의견만 존재하는 공간으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현상을 “청년들의 절차적 공정성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극단적 정치 세력들이 정쟁의 도구로 이용한 결과”라고 진단했다.

지난 14일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개표소 봉쇄 시위가 10일째 이어지고 있는 14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일대에서 시위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사진= 방인권 기자)
◇“다른 의견을 표출하면 프락치로 몰리더라”

4년차 직장인 이성준(31·가명) 씨는 스스로의 정치성향을 ‘중도’로 규정한다. 성인이 된 이후 정당이 아닌 인물과 공약을 꼼꼼하게 따져 신중히 투표했다. 공정성과 합리성. 그가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다. 이씨는 투표지 부족 사태를 접했을 때 “뱃속 깊은 곳으로부터 치밀어오르는 깊고 근본적인,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고 했다. 이씨는 선거 이튿날인 지난 4일 잠실7동 제2투표소였던 서울 송파구 우성아파트 경로당을, 6일에는 핸드볼경기장을 찾았다. 특정 정치세력의 개입을 거부하며 오직 ‘재선거’만을 요구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을 봤다. 이 씨는 감명을 받고, 일종의 효능감까지 느꼈다.

이틀만에 다시 찾은 광장은 ‘다름’을 용납하지 않았다. 현장의 구호는 ‘부정선거’로 시작해 ‘수개표’로 끝났다. 바뀐 구호를 들은 이씨는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주최자가 없는 자발적 시위였지만 그의 눈에는 사람들의 시선과 의견을 이끄는 특정 세력이 보였다.

주최자는 없었지만 주도자는 있었다고 이씨는 생각한다. 이씨는 “그들이 시위 현장의 공기를 바꿨다”고 말했다. 참정권 침해와 절차적 공정의 붕괴에만 항의하고자 했던 그는 혼란스러워졌다. 주변의 참가자에게 “부정선거 구호는 빼야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냉소와 의심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의문을 제기했던 참가자들이 ‘좌파 프락치’나 ‘대진연(한국대학생진보연합)’으로 몰려 곤욕을 당하는 것을 본 이 씨는 결국 시위 현장을 떠났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에너지공학을 전공하고 있는 박해원(20·가명)씨는 스스로를 ‘정치 고관여층’이라 여긴다. 진보 성향 정당을 지지하는 그는 6일 선거관리위원회의 부실하고 안일한 행태에 분노하며 시위 현장으로 향했다.

참가자들은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한 목소리로 참정권 침해 사태를 불러온 선관위를 규탄했다. 박씨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시위에 참석했다. 재선거 요구는 점차 부정선거론에 잠식됐다. 성조기가 등장했다.

시위 참가자들이 현장에 배치된 경찰을 조롱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시위 현장을 떠난 이유에 대해 박 씨는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질문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상황에 넌더리가 났다”고 설명했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개표소 봉쇄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지난 14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일대에서 시위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사진= 방인권 기자)
◇극단주의 기성 정치 세력이 청년들의 분노를 정쟁의 도구로 삼았다

전문가들은 절차적 공정과 참정권 침해 규탄을 외쳤던 청년 세대의 열망을 극단적인 정치세력이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시위의 방향이 바뀌고 청년들의 이탈을 가속화했다고 분석했다.

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참정권 회복과 공정성에 대한 열망이 좌우 이념의 프레임에 갇히고 진영 간 다툼과 음모론으로 오염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초기 시위를 이끌었던 청년들은 특정 정당의 승패가 아닌 참정권이 침해당했다는 정치적 좌절감과 분노를 동력으로 모였던 것”이라며 “이를 기성 정치세력이 낡은 이념의 도구로 소비하며 이에 실망한 청년들이 떠난 것”이라고 덧붙였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도 “조직된 세력인 부정선거론자들이 올림픽공원을 장악했다”며 “이에 불편함을 느낀 2030청년들은 보다 중립적인 온라인 공간으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지난 20일 오후에는 보수 성향 청년단체 ‘BOSS 홍대’가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재선거 요구 집회’를 진행했다. 이들은 ‘재선거’에 초점을 맞췄고, 성조기와 부정선거론 주장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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