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은 어떤 존재인가. 필자는 오래 이 질문을 품고 살았다. 필자가 만나온 어른은 당장 눈앞의 문제에 매몰되지 않는다. 급한 불을 끄는 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그 불이 왜 났는지를 멀리서 볼 줄 안다. 긴 호흡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여러 자리에서 세상을 읽는다. 나의 이익, 나의 주장을 앞세우기 전에 상대의 입장을 먼저 헤아린다. 그래서 배려할 줄 알고 필요할 때 기꺼이 양보한다.
그러나 어른은 늘 좋은 사람이 아니다. 양육과 교육의 자리에서 잘못된 방향 앞에서는 단호하게 꾸짖을 줄 안다. 용기 있게 바른 방향을 제시한다.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비겁하게 침묵하거나 좋은 사람의 탈을 쓰지 않는다. 진짜 어른의 말은 때로 따뜻하지 않다. 그러나 그 말이 무거울수록 오래 기억된다.
이것은 특정한 위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 사이에서, 동네 한 귀퉁이에서, 조용히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밥상 앞에서 말보다 먼저 숟가락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 이웃의 잘못을 못 본 척하지 않되 망신 주지 않고 바로잡는 사람. 손자 앞에서 후배 앞에서 한 번 더 반듯하게 앉는 사람.
어른을 떠올릴 때 필자는 화려한 이력보다 어떤 장면을 먼저 떠올린다. 일본 유학 시절 뜻하지 않은 어려움 앞에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을 고민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 물심양면으로 손을 내밀어 주신 교수님이 계셨다. 이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는 말을 전하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베푼 것은 내게 갚지 않아도 된다. 언젠가 너와 같은 자리에 놓인 후배에게 흘려보내면 된다”고 말이다. 그 말이 가슴 깊이 박혔다. 지금도 그 메시지를 품고 산다. 그분이 어떤 직함을 가졌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순간의 태도는 오래도록 남아 있다. 어른은 그렇게 기억된다.
노사연은 노래 ‘바램’에서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라고 나이듦을 표현했다. 나이 든다는 것은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기회이기도 하다. 살아온 시간이 쌓일수록 할 수 있는 것들이 생긴다. 조급하지 않게 들어줄 수 있고 경험으로 길을 낼 수 있고 잃을 것이 두렵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제대로 익은 것은 향이 다르듯 어른으로 나이 드는 것은 이 기회를 붙잡는 일이다. 나이가 주는 자유를 자기만을 위해 쓰지 않고 주변을 위해 쓰는 일. 그것이 나이듦의 특권이자 책임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기꺼이 지는 삶에는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어른이 아니라 그저 나이만 먹은 노인(老人, 늙을 로·사람 인)일 뿐이다. 나이는 어른을 만들지 않는다. 나이는 그저 기회를 늘릴 뿐이다. 어른이 될 기회, 혹은 끝내 되지 못할 기회. 일흔이 넘어도 제 몫만 챙기는 사람이 있고 서른에 이미 어른이 된 사람도 있다. 어른의 무게를 감당할 자, 과연 얼마나 될까.
초고령사회의 위기를 우리는 늘 숫자로 말한다. 노인 인구 비율, 부양비, 의료비 증가율. 그러나 숫자 너머에 있는 질문이 있다. 이 많은 노인 중에 다음 세대가 기댈 수 있는 어른이 얼마나 있는가. 세대 간 갈등은 자원을 둘러싼 싸움이기도 하지만 그 싸움을 중재하고 조율할 어른의 부재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 이런 어른이 많다면 초고령사회를 조금 더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세대 간 갈등이 아니라 세대 간 조화를 이루는 사회. 그것은 제도가 먼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제도는 어른이 설 자리를 마련해줄 뿐 어른 그 자체를 길러내지는 못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어른으로 익어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 시작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내 자리에서 조금 더 반듯하게 앉는 것으로 충분하다. 1000만 노인의 나라에서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어른이다. 그리고 그 한 명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