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기 광주교대 명예교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21세기의 문맹을 두고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운 것을 일부러 잊고, 다시 배우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말을 교육학 용어로 재해석하면 '탈학습'(unlearning) 역량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탈학습은 '학습을 통해 습득한 나쁜 습관이나 잘못된 정보를 기억에서 폐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탈학습은 제대로 된 지식과 관점 그리고 태도를 다시 학습하는 것까지 포함한 개념이다.
탈학습은 학습과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라 학습의 의미를 새로운 관점에서 깨닫도록 돕는 개념이다. 기존의 교수법은 새로운 것을 어떻게 잘 가르칠 것인가에만 초점을 맞췄다. 학생들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출발점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는 파악했지만 갖고 있는 것을 버리도록 하는 부분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탈학습'이 시급한 대한민국 교실
오늘날 대한민국 교실이 직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바로 이 탈학습이다. 최근 불거진 배재고등학교 야구부의 역사 왜곡과 혐오 발언 그리고 초·중·고교 전반에 유행처럼 번진 '혐오의 놀이화' 현상은 학교가 이미 학생들의 머릿속에 박힌 잘못된 것들을 어떻게 지우고, 다시 채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교실 내 혐오와 차별 문화를 해결하기 위해 제안된 안은 주로 법과 제도의 정비에 치우쳐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나 교권 보호 대책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제도적 접근은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뿐이다. 진정한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매일 아이들이 숨 쉬는 교실 현장에서 교육·문화적 접근이 병행돼야 한다. 또한 교육부나 교육청이 제시하는 프로그램을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주도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벗어나도록 돕는 탈학습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 학생들의 낮은 정보 문해력
현대 사회에서 유해 정보와 가짜뉴스는 공식적인 교육 과정이 아니라 소셜 미디어 등의 일상적 학습 환경을 통해 무분별하게 흡수된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온라인 정보의 사실 여부에 대한 학생들의 식별 역량과 의지다. 'PISA(OECD 주관 국제학업성취도평가) 2022' 결과에 따르면 우리 학생들의 정보 판별 능력은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온라인에서 읽는 것을 믿는다'고 답한 한국 학생이 50.9%로 OECD 평균(39.8%)보다 높았다. 사실과 의견 식별률은 25.6%로 OECD 평균(47%)에 못 미치는 세계 최하위권이었다. 미국(69%)이나 영국(65.2%)과 비교하면 차이가 아주 크다. 정보의 출처를 비교하거나 신뢰성을 평가하는 '팩트 체크' 지수 역시 꼴찌 수준이었다.
가정과 학교가 인공지능(AI) 시대에 걸맞은 문해력을 제대로 길러주지 못하는 사이 아이들은 무비판적으로 고정관념과 혐오를 학습해 왔다. 잘못 학습된 지식은 교실 안에서 밈(짧은 영상·이미지에 자막을 얹어 풍자적으로 소비하는 인터넷 콘텐츠)이나 게임, 유행어라는 옷을 입고 '재미있는 놀이'로 소비돼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교가 더 고민해야 할 것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것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가 아니라 교실에 들어오기 전까지 잘못 배운 것들을 어떻게 잊게(unlearn) 하고 제대로 된 지식과 관점을 갖도록 할 것인가다.
교사노동조합연맹 조합원과 강경숙 조국혁신당 의원이 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배재고 사태 규탄 교실에 스며든 혐오와 조롱, 범사회적 대응방안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뉴스1 유승관 기자
교실 안 '혐오 놀이' 극복 처방 3가지
기존의 관성적인 문제 행동과 인식을 깨뜨리고 새로운 가치관을 재구성하기 위한 탈학습은 해체, 인지 전환, 재구성의 흐름으로 진행된다. 이 흐름에 맞춰 교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3단계 탈학습 처방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밈의 포장을 벗기는 해체 단계다. 이 단계의 목적은 학생들이 재미로 소비하는 혐오 표현의 객관적 본질을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법에는 교실에서 자주 쓰이는 유행어나 밈의 단어 지도를 그려봄으로써 해당 단어가 어디서 유래했는지, 어떤 사회적 약자를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칼날인지를 시각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어원 추적 활동'이 있다.
그리고 혐오 밈이 포함된 짧은 영상이나 글에서 유머러스한 자막이나 재미있는 효과음을 모두 제거한 뒤 오직 텍스트 문장과 상황 자체만 칠판에 적어 읽게 하는 '맥락 효과 제거' 활동도 있다. 웃음이라는 보호막을 걷어냈을 때 그 언어가 얼마나 잔인한 폭력인지 학생 스스로 느끼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타인의 고통을 예민하게 느끼도록 돕는 인지 전환, 즉 정서적 탈학습 단계다. 주체와 객체의 위치를 바꿔 혐오 놀이의 표적이 된 가상의 인물 시점에서 일기 쓰기, 모의 인터뷰를 진행함으로써 사회적 고립감과 심리적 위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표현이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족이나 너 자신을 향할 때도 여전히 유쾌한 놀이가 될 수 있는가"라는 '반사경 질문'은 아이들의 무감각한 방어기제를 무력화하고 타인의 아픔을 복원하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인부터 탈학습 노력 멈추지 말아야
셋째는 기존의 혐오 놀이를 대체할 수 있는 건강한 교실 문화와 언어 습관을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채워 넣도록 돕는 재구성 단계다. 학생들의 언어적 유희 욕구 자체를 억압하면 교육은 실패한다. 혐오 단어 대신 사용할 수 있는 기발하고 무해한 유행어 공모전 등을 통해 건강한 언어 놀이를 이끌 필요가 있다. 교실 내에서 누군가 혐오 놀이를 시작할 때 분위기를 깨지 않으면서도 이를 멈추게 하는 학급 공동체의 신호를 만들고 연습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다.
탈학습 기법을 통해 바람직한 교실 문화를 만들고자 할 때 명심할 것이 있다. 교수자의 역할은 새로운 지식 전달자 이전에 '탈학습 조력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교수자는 어떻게 해야 학생들이 가진 잘못된 인식과 태도를 안전하게 잊고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으로 채우게 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탈학습 과제는 비단 학생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교사를 포함한 사회의 모든 성인 역시 과거의 잘못된 관념과 차별적 시선을 지워내기 위한 진지한 탈학습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 박남기 광주교대 명예교수는…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교육정책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국가인재경영연구원 교육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광주교대 총장, 한국교육행정학회장, 대한교육법학회장, 한국교원교육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최고의 교수법, 리더십 등을 주제로 1000회 이상의 강연을 통해 세상과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는 '실력의 배신'(2018), '생성 AI 시대 최고의 교수법'(2024) 등 20여 권이 있고, 100여 편의 논문과 1000편 이상의 칼럼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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