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오늘] "모두 쏴 죽여라" 226명 학살…노근리 피난민은 왜 표적이 됐나

사회

이데일리,

2026년 7월 25일, 오전 12:01

[이데일리 김주환 기자] 1950년 7월 25일,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일대에서 전대미문의 참극이 벌어졌다. 당시 영동 지역 방어에 투입됐으나 북한군에 밀려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하던 미 육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이들이 인근 마을 주민 수백 명의 피난 행렬을 강제로 막아서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기사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한 연출 이미지. (이미지=나노바나나 생성)
기사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한 연출 이미지. (이미지=나노바나나 생성)
미군의 유도에 따라 짐을 꾸려 남하하던 피난민들은 이튿날인 26일 4번 국도를 지나 경부선 철로로 진입한 직후 갑작스럽게 날아든 미군 전투기로부터 무차별 공중 폭격을 당했다.

폭격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피난민들은 인근 노근리의 개근철교(쌍굴) 아래로 피신했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 지상군은 굴다리 양쪽 입구를 차단하고 기관총을 거치한 뒤 안에 갇혀 있던 피난민들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했다.

29일까지 무려 70여 시간 동안 사격은 계속됐다. 피난민들은 쏟아지는 총탄을 피하려 맨손으로 철도 자갈을 파고들거나 먼저 숨진 이웃과 가족의 시신 아래 엎드려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이 사흘 밤낮의 무차별 사격으로 한국 정부가 공식 인정한 피해자는 226명(사망 150명)에 달한다. 실제 희생자는 4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두 쏴 죽여라” 상부 지침이 부른 참혹한 학살

이같은 학살의 기저에는 ‘피난민 속에 북한군이 위장 잠입했다’는 미군 수뇌부의 극단적인 공포와 지휘 무능이 자리하고 있었다.

25일 저녁 미 8군은 주한미국대사관 및 한국 정부와 피난민 통제 대책 회의를 열고 “피난민을 군사적 관점에서 통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존 무초 주한미국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고하며 “차후 논란이 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할 만큼 강경하고 이례적인 방침이었다.

노근리 사건 당시 피난민들이 대피했던 충북 영동군 황간면에 위치한 개근철교(쌍굴). (사진=연합뉴스)
노근리 사건 당시 피난민들이 대피했던 충북 영동군 황간면에 위치한 개근철교(쌍굴). (사진=연합뉴스)
결국 26일 오전 10시께 미 8군 사령부로부터 “피난민이 방어선을 넘지 못하게 하라”는 지침이 하달됐다. 당시 작성된 미 제5공군 전방지휘소 터너 로저스 대령의 작성 메모에도 “육군이 민간 피난민에 대한 항공기 기총 사격을 요청했다”는 대목이 명시돼 있다. 상부의 통제 지침이 현장에서는 곧바로 민간인을 향한 살상 명령으로 변질된 순간이었다.

당시 현장에 투입됐던 미군 참전용사 조지 얼리는 훗날 인터뷰를 통해 “소대장이 ‘모두 쏴 죽여라’라고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며 “그곳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고 당시 참혹했던 현장을 회고했다.

◇반세기 묻힌 진실, 여전히 패어 있는 역사의 상흔

가해자인 미군의 은폐와 정부의 방관 속에서 끔찍한 참극의 실체는 반세기 동안 묻혀 있었다. “노근리에 미군이 주둔한 적조차 없다”는 미국 측의 전면 부인과 냉전 기류 속에서 유족들은 수십 년간 억울함조차 제대로 호소하지 못한 채 숨죽여 눈물을 삼켜야 했다.

견고했던 침묵에 균열을 낸 건 유족의 끈질긴 추적이었다. 故 정은용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위원장이 1994년 출간한 실록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가 계기가 됐다.

이를 바탕으로 추적에 나선 AP통신 취재팀은 1999년 미 군사 기밀문서와 참전용사들의 육성을 발굴해 보도했다. 은폐된 참극의 실체를 파헤친 이 보도는 2000년 퓰리처상 수상으로 이어지며 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참극이 벌어진 지 76년이 흐른 지금도 영동역과 황간역 사이 노근리 개근철교(쌍굴) 콘크리트 벽면에는 당시 미군이 퍼부은 수백 발의 총탄 자국이 깊은 상흔으로 패어 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스러져간 무고한 삶들. 그날의 아픈 상흔은 지금도 주곡천 물길 곁에서 묵묵히 역사의 진실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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