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 중, 천만원만 보내줘"…전쟁 파고든 로맨스스캠

사회

이데일리,

2026년 7월 31일, 오전 10:49

[이데일리 석지헌 기자] “레바논 공항에서 전쟁 때문에 돈을 꺼낼 수가 없네요. 폭격이 벌어지고 있으니 비행기표 값으로 1000만원만 보내주세요!”

인공지능(AI)으로 생성한 이미지.
인공지능(AI)으로 생성한 이미지.
이성적 호감을 이용하던 로맨스스캠 범죄가 분쟁지역 피해자나 국제기구 직원을 사칭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전쟁 상황을 내세워 피해자의 동정심을 자극한 뒤 항공료와 각종 경비 명목으로 돈을 요구하는 수법이다. 법원은 이 같은 범행에 가담해 피해금을 가상화폐로 바꿔 전달한 현금수거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SNS서 현금수거책 모집… “수수료 3% 주겠다”

서울북부지법 형사7단독(판사 정덕수)은 사기방조 혐의로 기소된 권모(67) 씨에게 지난달 23일 징역 9개월을 선고했다.

권 씨가 범죄에 가담한 것은 2024년 11월이다. 권 씨는 네이버 밴드에서 알게 된 성명불상자 ‘데이비스’로부터 또 다른 성명불상자를 소개받았다. 이 인물은 권 씨에게 “고객이 이체한 돈을 가상화폐로 바꿔 보내주면 수수료로 3%를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권 씨는 해당 행위가 사기 범행과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직은 이처럼 SNS를 통해 현금수거책을 모집했다. 조직원들은 서로의 신원과 역할을 정확히 알지 못하도록 점조직 형태로 활동하며 수사기관의 추적에 대비했다.

이 조직은 전통적인 로맨스스캠과 다른 방식으로 피해자에게 접근했다. 기존 로맨스스캠이 이성적 관심을 가장해 호감을 얻은 뒤 돈을 요구했다면, 이들은 분쟁지역의 긴박한 상황을 내세워 피해자의 동정심을 자극했다.

조직원은 지난해 3월께 네이버 밴드에서 알게 된 피해자에게 “레바논 공항에서 전쟁 때문에 돈을 꺼낼 수 없다”며 “폭격이 벌어지고 있으니 비행기표 값으로 1000만원을 보내달라”고 속였다.

그러나 조직원은 레바논에 거주하고 있지 않았고 돈을 돌려줄 의사나 능력도 없었다. 처음부터 피해금을 가로챌 목적이었다.

이 말을 믿은 피해자는 지난해 3월 25일 권 씨 명의의 농협은행 계좌로 1000만원을 송금했다.

또 다른 피해자에게는 국제기구 직원을 사칭했다. 조직원은 지난해 3월께 인터넷 채팅을 통해 피해자에게 접근해 “UN 의료지원단 소속으로 레바논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거짓말했다.

이어 “한국으로 귀국하려면 항공료 100만원이 필요하다”고 돈을 요구했다. 이후에는 “사령관 인증을 위한 경비가 필요하다”며 추가로 100만원을 요구했다. 피해자는 두 차례에 걸쳐 총 200만원을 권 씨의 계좌로 보냈다.

하지만 해당 조직원은 UN 직원이 아니었으며, 피해자로부터 돈을 받아 가로챌 목적만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권 씨는 피해금이 입금되자 이를 비트코인으로 환전한 뒤 조직원이 지정한 가상화폐 주소로 전송했다. 피해금을 가상화폐로 바꿔 자금 흐름과 최종 수취인을 추적하기 어렵게 하려는 방식이었다.

두 피해자가 권 씨의 계좌로 보낸 돈은 모두 1200만원이었다. 권 씨는 피해자들을 직접 속이지는 않았지만 피해금을 조직에 전달하는 현금수거책 역할을 맡아 범행을 도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로맨스스캠 수법 정교해지고 다양해져”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최근 로맨스스캠 범죄가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로맨스스캠 범죄는 피해자에 대한 이성적 관심을 가장해 호감을 얻은 다음 사기를 저지르는 수법으로 정의되고 있다”면서도 “최근에는 이성적으로 접근한 뒤 재력을 과시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전에 준비한 허위 쇼핑몰 사이트, 코인거래소, 메타거래소, 가짜 은행 등의 링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주식·선물·금 투자 등 다양한 투자 유형에 따른 수익금 지급을 약속한 뒤 돈을 편취하는 등 범행 수법이 더욱 정교해지고 다양한 양상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권 씨에게 징역 9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권 씨가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한 점, 초범인 점,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점은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했다.

그러나 로맨스스캠 범죄의 현금수거책으로 가담해 죄질이 좋지 않은 점과 피해금이 전혀 회복되지 않은 점은 불리한 정상으로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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