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보다 적적함이 더 힘들다" 탑골로 가는 노인들

사회

이데일리,

2026년 8월 07일, 오전 07:08

[이데일리 석지헌 기자 김태섭 수습기자] “집에 있으면 맨날 잡념만 생기고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어. 그런데 여기 와서 사람들하고 대화 나누면 기분이 상쾌해져.”

인천에 사는 최종대(80) 씨는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으로 향한다. 폭염이 연일 이어지고 있지만 최씨는 탑골공원으로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서울시와 종로구는 폭염에 취약한 노인들에게 경로당·노인복지관·무더위쉼터 이용을 권유하지만 탑골공원은 최씨와 같은 노인들로 장사진이다.

특히 지난해 탑골공원 환경 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장기판을 모두 철거했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을 원하는 노인들이 여전히 이곳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대급 폭염에 노인들이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세심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난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 원각사무료급식소 앞에서 노인들이 아침 식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이날 준비된 주먹밥 250개가량은 배부를 시작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대부분 동났다. (사진=김태섭 수습기자)
지난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 원각사무료급식소 앞에서 노인들이 아침 식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이날 준비된 주먹밥 250개가량은 배부를 시작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대부분 동났다. (사진=김태섭 수습기자)
◇“뜨거워도 얘기 나눌 수 있는 곳 좋아”

5일 오전 8시20분께 취재진이 찾아간 탑골공원 인근 원각사무료급식소 앞에는 100m가량 긴 줄이 늘어섰다. 노인들은 지팡이에 몸을 기대거나 바닥에 박스를 깔고 앉아 아침 주먹밥을 기다렸다. 오전 8시30분 주먹밥을 배부하자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준비수량(250개)은 모두 동이 났다. 급식소 봉사자는 “아침에는 보통 200~250명이 급식소를 찾는다”며 “봉사자가 5명 정도뿐이라 모든 분께 다 드리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말했다.

이날 서울 전역은 낮 최고기온 37~39도에 달할 정도로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 밤에도 식지 않는 열기로 아침에도 거리는 후끈했다. 이들은 오전 9시 탑골공원의 문이 열리자 큰 나무 밑과 정자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곤 다양한 소재의 대화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한 노인은 “더워도 나와 돌아다녀야지 집에 있으면 없던 병도 생긴다”며 그늘을 향해 몸을 옮겼다.

종로구는 작년 7월 탑골공원 담벼락 주변의 장기판을 철거했다. 장기판을 중심으로 노인들이 몰리면서 소음이나 흡연 등 민원이 빈번하게 발생해서다. 시와 구는 이곳에 모이는 노인들을 주변 시설로 안내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노인들은 폭염을 뚫고 탑골공원에 모이고 있다.

이에 대해 노인들을 소통의 장으로 옮길 유인이 부족해서라는 지적이 나온다. 탑골공원 바로 옆에는 종로구가 마련한 실내 시설 ‘탑골 어르신 문화 놀이터’가 있지만 공간이 그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실제 이 공간엔 60명 가량이 한꺼번에 몰리면 금세 포화 상태가 됐다. 종로구 어르신복지과 관계자는 “이용 인원이 적지 않고 마련한 자리에 비해 방문하는 노인들이 많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경로당이나 노인복지관도 탑골공원의 대체재가 되지 못했다. 기자와 탑골공원에서 만난 한 노인은 “내 나이면 경로당에 갈 나이인데, 가면 텃세를 부릴까 봐 못 간다”고 말했다. 또 다른 노인은 “여기로 오는 사람들은 동네에서 대우받지 못하는 노인들”이라며 “정신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여유가 있는 노인은 복지관에 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여기로 온다”고 말했다.

지방자치단체가 추천하는 기존 노인 커뮤니티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허들’을 넘지 못하는 이들이 탑골공원으로 다시 모여든 것이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탑골공원 노인들이) 경로당 등에 가도 이미 텃세가 있으니 낄 곳이 없다는 생각들을 하는 것”이라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명성을 전제로 모이는 탑골공원을 오히려 더 편하게 느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폭염에 위험 노출…노인 여러 니즈 맞춘 시설 필요”

문제는 노인들이 폭염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지난 5월 15일부터 8월 4일까지 신고된 온열질환자 총 2441명 중 65세 이상은 825명(33.8%), 80세 이상은 300명(12.3%)에 달했다. 인구 10만명당 신고환자 수는 80세 이상이 12.5명으로 모든 연령대 가운데 가장 높았다. 이어 70대 7.4명, 60대 5.8명 순이었다.

전문가들은 폭염에 모인 탑골공원의 문제를 복지 측면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다. 왜 이들이 복지시설로 유입되지 못하고 극단적인 폭염에도 야외 시설에 모여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허준수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우리는 노인을 단일한 집단으로 생각해 노인이 되면 경로당, 노인정, 노인복지관에 가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다”며 “그들이 지역사회에 머물지 않고 종로까지 오는지, 각자의 욕구를 파악해 해소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런 문제를 해소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탑골공원을 없애고 훌륭한 편의시설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노인들은 ‘제2의 탑골공원’과 같은 새롭게 모이는 장소가 생길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탑골 어르신 문화 놀이터'에서 노인들이 장기와 바둑을 두거나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이곳은 탑골공원 내 장기·바둑 금지 조치에 따라 종로구가 마련한 대체 공간이다. (사진=김태섭 수습기자)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탑골 어르신 문화 놀이터'에서 노인들이 장기와 바둑을 두거나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이곳은 탑골공원 내 장기·바둑 금지 조치에 따라 종로구가 마련한 대체 공간이다. (사진=김태섭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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