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화면을 볼 때 느끼는 ‘답답함’은 사실 기술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눈으로 보이는 세상의 색은 다채로운데, 디스플레이는 그중 일부만 골라 보여주는 방식이라 단순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액정디스플레이(LCD)는 자연색을 다 표현하기 어렵고,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도 색이 완전히 선명하진 않다. 스마트폰·TV 등 전자기기의 성능은 매년 조금씩 좋아지고 있지만, 디스플레이 기술적은 어느정도 벽에 다다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같은 한계 때문에 업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다음 세대 디스플레이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이어져 왔다. 더 넓은 색을 구현하고, 작은 화면에서도 충분한 밝기를 낼 수 있으며, 전력 소모까지 줄일 수 있는 새로운 발광 소재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다만 현실적으로 이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소재 후보는 많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연구계가 다시 검토하기 시작한 소재가 바로 ‘페로브스카이트’다.
◇태양전지 재료에서 차세대 디스플레이 소재로
이태우 에스엔디스플레이 대표
페로브스카이트는 원래 태양전지에 쓰이던 재료다. 상온에서는 빛을 거의 내지 않고, 효율도 낮아 발광 소재로는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태우 교수(에스엔디스플레이 대표)가 이끄는 서울대 연구팀이 지난 2015년 발광 소자를 구현하는 데 성공하면서 상업화에 대한 가능성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이태우 에스엔디스플레이 대표는 “수십 년 동안 발광체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재료였다"며 "하지만 고효율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차세대 발광 재료로 각광받기 시작했고, 세계적으로 관련 연구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에스엔디스플레이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페로브스카이트를 기반으로 한 디스플레이 개발을 위해 2020년 설립됐다. 소재·공정·소자·응용 기술을 포함한 특허 45건을 확보했고, 현재 TV·모니터 등 기존 QLED 시장을 시작으로 AR·VR용 초소형 디스플레이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페로브스카이트 소재의 핵심 경쟁력은 색 표현력이다. 색 영역에 대한 국제 표준인 Rec.2020 범위를 모두 구현할 만큼 표현 가능한 색의 폭이 넓고, 같은 초록·빨강이라도 번지는 느낌 없이 또렷하게 찍힌다. 기존 디스플레이가 24색 색연필 세트로 그림을 그리는 수준이라면, 페로브스카이트는 48색 세트에 가까운 셈이다.
밝기에서는 차이가 더 크다. 페로브스카이트는 물질 부피당 발광량이 기존 소재보다 크게는 5배까지 높다. 같은 크기의 픽셀을 비교하면 빛을 훨씬 많이 낼 수 있기 때문에 작은 화면일수록 장점이 뚜렷해진다.
예를 들어 QLED는 TV처럼 큰 화면에서는 경쟁력이 있지만, 화면이 손바닥 크기 이하로 줄어들면 원하는 밝기를 내기 어려워진다. 같은 색을 내기 위해 더 많은 물질을 써야 하고, 그만큼 효율이 떨어지는 것이다. 반면 페로브스카이트는 물질 부피당 발광량이 커 작은 공간에서도 충분한 광량을 확보할 수 있다.
실제 에스엔디스플레이는 지난해부터 미국 빅테크 기업과 AR(증강현실)·VR(가상현실) 관련 연구 및 개발을 진행해 오고 있다. 이 대표는 “페로브스카이트는 눈앞에서 화면을 보는 AR·VR이나 스마트 글라스처럼 ‘작지만 아주 밝아야 하는’ 디스플레이에 더욱 적합한 구조”라고 설명했다
◇적은 에너지·낮은 원가...LCD·OLED 한계 극복
페로브스카이트는 적은 양의 전류로도 충분한 빛을 낼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전력 효율도 높다. 이 대표는 “모바일·웨어러블 기기는 밝기보다 배터리 유지 시간이 더 중요한 시대”라며 “동일 밝기를 유지하면서 소비전력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가격 경쟁력도 크다. 페로브스카이트 소재는 OLED·QLED 대비 원가가 25분의 1 수준이다. 대량 합성 단계에서는 추가 절감도 가능해 고해상도 디스플레이의 제조 원가 구조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이 회사측 설명이다. 이 외에도 안전성 측면에서도 기존 디스플레이 소재 대비 경쟁력이 있다. 기존 양자점(QD) 소재 중 일부는 중금속 규제 이슈가 반복됐지만, 페로브스카이트는 인체 자연 함유량(치아·뼈 등 35~40ppm)보다 낮은 수준의 납 함량으로 구현할 수 있다.
한편 이 대표는 페로브스카이트라는 새로운 소재의 상용화 속도에서는 한국이 시간적으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라는 점에 우려를 표했다. 현재 대다수 국내 디스플레이 업체들이 당면한 현실은 녹록지만은 않다. LCD는 이미 수익성이 사라졌고, OLED·QLED 역시 수년간의 공정 최적화로 원가 절감 여지가 거의 남지 않은 상태다. 추가적인 경쟁력 개선이 쉽지 않은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반면 글로벌 시장에서는 각 국가들이 새로운 기술에 대해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며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중국은 지방정부 펀드와 국가 R&D 프로그램을 통해 페로브스카이트 기술에 대규모로 투자했으며, 주요 패널 업체들 역시 페로브스카이트 기반 TV·모듈 시험 생산을 빠르게 추진중이다.
이 대표는 “지금 기술 격차를 유지하지 못하면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이 또 한 번 추격당할 수 있다”며 “기초기술을 보유한 기업이 성장해 나갈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야 글로벌 주도권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