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아무것도 결정난 것이 없음에도 국민연금이 국내주식 비중을 크게 상향할 것처럼 이야기 하는게 누구겠느냐"
국민 노후자금이 주식시장 부양에 동원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국민연금은 오는 28일 기금운용위원회에서 향후 5년간 기금 운용 방향을 정하는 중기자산배분안을 결정한다. 핵심 쟁점 중 하나는 국내주식 목표비중이다. 올해 국내 증시 급등으로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보유 비중이 이미 목표치를 크게 웃도는 가운데, 정부가 국내주식 비중 상향 쪽으로 논의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는 지적이 투자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목표비중을 높이면 당장은 국민연금이 주식을 팔아야 하는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비중이 높아질수록 기금 운용 성과는 국내 경기와 증시 흐름에 더 크게 좌우된다. 장기적으로는 위험분산 원칙이 약해지고, 향후 연금 지급을 위해 보유 주식을 현금화해야 할 때 시장 충격과 손실 부담이 미래세대로 넘어갈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의 국내주식 상향 압박"…국민연금 분산투자 원칙 흔들리나
23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오는 28일 기금운용위원회에서 2027~2031년 중기자산배분안을 심의·의결한다. 중기자산배분은 향후 5년간 국민연금 기금 운용의 기준이 되는 자산군별 목표비중을 정하는 절차다. 이번 회의에서는 국내주식 목표비중도 함께 결정된다. 현재까지 구체적으로 확정된 안은 없지만, 투자업계에서는 국내주식 비중 상향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정부가 국내 증시 수급 부담을 이유로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논의를 유도하고 있다는 평가다.
국내주식 비중 상향론이 나오는 배경에는 국민연금의 리밸런싱 부담이 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국내 증시 강세로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보유 비중은 현행 목표치를 크게 웃돌고 있다. 국민연금에 따르면 지난 2월 말 기준 국내주식 투자 규모는 395조1000억원으로 전체 기금 1610조4000억원의 24.5%를 차지했다. 국민연금의 2026년 말 국내주식 목표비중이 14.9%인 점을 감안하면 실제 보유 비중과 목표비중 사이의 괴리가 크다. 시장에서는 이후 증시 상승분까지 반영하면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평가액이 500조원 안팎까지 불어났고, 전체 포트폴리오 내 비중도 25%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원칙대로라면 목표비중을 초과한 자산은 리밸런싱을 통해 줄여야 한다. 특정 자산 가격이 급등해 포트폴리오 내 비중이 과도하게 높아지면 일부를 매도하고 다른 자산군과 균형을 맞추는 것이 장기 자산배분의 기본이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국내주식을 대규모로 매도할 경우 시장 충격이 상당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증시가 구조적 상승세로 바뀌었으니 국내주식 목표비중을 높이고 매도 부담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문제는 국내주식 비중을 높이면 당장은 매도 압력을 늦출 수 있지만, 그만큼 국민연금의 국내 증시 노출도 심해진다는 점이다. 국민연금 자산에서 국내 주식 비중이 과도하게 높아질수록 국민연금의 장기 수익률은 국내 경기와 증시 흐름에 더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연금 안정성을 위해 위험을 분산해야 하는 장기투자자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선택이다.
더욱이 이번 결정은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 이뤄진다. 시장에서는 정치 일정을 앞두고 정부가 국민연금의 리밸런싱 매도 부담을 줄이는 쪽으로 논의를 끌고 가려는 유인이 커졌다고 보고 있다. 국내주식 목표비중은 국민연금의 매매 방향뿐 아니라 국내 증시 수급과 투자심리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이이기 때문이다. 국내주식 비중 상향이 가입자 이익보다 단기 증시 안정에 무게를 둔 결정이라면 기금운용 독립성과 수탁자 책임 논란은 불가피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 투자업계 전문가는 “정부가 국내 증시 부양을 위해 국민연금의 주식 비중을 높이려는 의지가 엿보인다”며 “복지부와 국민연금 모두 부담을 느끼는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난 것이 없음에도 국민연금이 국내주식 비중을 크게 상향할 것처럼 이야기 하는게 누구겠느냐"고 지적했다.
기금운용위원회에서 발언하는 정은경 복지부 장관(사진=보건복지부 제공)
◇연금 지급하려면 결국 팔아야 할 주식…미래세대 부담 키우나
시장에서는 지금 팔지 않는다고 부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도 지적한다. 국민연금은 지금까지 기금이 쌓이는 과정에서 국내 증시의 장기 매수자 역할을 해왔지만, 연금 지급이 본격적으로 늘어나는 시점에는 결국 보유자산을 현금화해야 한다. 문제는 국민연금이 국내 증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이미 크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보유가 더 늘어날수록 향후 자산을 현금화하는 과정에서 시장 충격을 줄이기 어려워질 수 있다.
최근 국민연금 수익률 개선이나 국내 증시 상승에 따른 기금 고갈 시점 연장 기대도 국내주식 확대의 충분한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주가 상승은 국민연금의 평가액을 키우고 재정 전망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국민연금 재정은 특정 시기의 증시 흐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보험료 수입, 급여 지출, 인구구조, 장기 운용수익률이 함께 작용한다. 단기 증시 호조를 근거로 국내주식 비중을 높이면 당장은 기금 규모가 커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포트폴리오가 국내 증시 흐름에 더 크게 좌우될 수 있다.
국내주식 비중 상향 논의는 단순한 자산배분 조정을 넘어 기금운용 원칙과도 맞닿아 있다. 국민연금은 정부의 정책 수단이 아니라 가입자의 노후자금을 운용하는 기금이다. 자산배분은 국내 증시 수급보다 장기 수익률과 위험분산, 미래 지급 능력을 기준으로 정해져야 한다. 단기 시장 충격을 피하기 위해 국내주식 목표비중을 높이는 결정이 반복될 경우, 현재의 부담을 미래 가입자와 세대에 넘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연기금 전문가는 “국민연금이 점점 국내 증시의 ‘어항 속 고래’가 되고 있다”며 “당장의 수익과 기금 규모 확대는 환영할 일이지만 상당 부분은 평가상 이익이다. 언젠가 연금 지급을 위해 내다 팔아야 할 때 시장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연금과 국내 증시가 지나치게 깊게 묶이면 연금과 시장 모두에 부담이 되는 상호 파괴적 구조가 될 수 있다”며 “그 부담은 결국 미래세대가 지게 된다. 정부가 상법개정을 3차까지 이끌고, 기업 거버넌스를 바로세운 것에는 박수를 보낸다. 다만 국민연금을 증시 부양에 쓰는건 약탈적 거버넌스"라고 비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