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지난 2월 27일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AFP)
◇“실상은 부분적 관세 완화…FTA 아닌 임시 합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8일(현지시간) 무역협정을 체결했다고 공동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양국 경제에 큰 기회를 열었다”며 환영했고, 스타머 총리도 “역사적이고 특별한 날”이라고 자평했다.
하지만 BBC, 뉴욕타임스(NYT),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실상은 ‘부분적 관세 완화’”라며 “포괄적 자유무역협정(FTA)과는 거리가 먼 제한적·임시적 합의”라고 입모아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무역 확대보다는 산업별 접근 전략에 가깝다”고 했다.
양국 내 분위기도 다소 엇갈린다. 영국에선 “최악은 피했다” “선방했다”는 분위기다. 사실상 가장 낮은 관세율인 데다, 주요 교역국인 유럽연합(EU·20%)이나 중국(34%)과 비교하면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차분하고 실용적인 협상 전략이 주효했다”고 자찬하며, 스타머 총리가 미국의 방위비 증액 요구에 신속히 동참한 점, 양국 ‘특별관계’를 적극 활용한 점을 부각했다.
반면 미국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력을 과시하기 위해 서둘러 영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했다는 분석이 지배적다. 그나마 상대하기 쉬운 영국과의 합의를 지렛대로 삼아 다른 나라에도 조속한 합의를 종용하기 위한 의도라는 것이다. NYT는 “영국과의 협상 체결은 트럼프 행정부가 글로벌 무역질서 재편의 주도권을 쥐고 각국에 개별 협상을 압박하는 전략”이라고 짚었다.
◇경제 효과도 회의적…“의약품 등 핵심은 빠져”
경제적 효과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한 기본합의(framework)에 따르면 미국은 영국산 자동차 10만대에 10% 관세를 적용키로 했다. 기존에 적용됐던 27.5%(기존 2.5%+품목별 추가 관세 25%)에서 대폭 낮아진 것이다. 철강·알루미늄 관세(25%)는 단계적으로 철폐하기로 했다. 또 향후 합의 부문들에 대한 추가 관세가 부과되더라도 우선 협상권을 보장받았다.
반대로 영국은 미국산 소고기, 에탄올, 스포츠용품 등에 대한 관세를 인하하고, 100억달러 규모의 보잉 항공기 구매를 약속했다. 미국은 자국산 농산물, 화학제품, 에너지, 공산품에 대한 통관 절차 간소화 카드도 받아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영국 시장에서 1만 3000톤(t)의 소고기 무관세 수입 쿼터를 적용받는다. 영국의 디지털 서비스세가 미국 빅테크 기업을 겨냥하고 있다는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향후 디지털 무역 협정도 추진하기로 했다.
문제는 추가 협상이 남아 있는 데다, 의약품, 디지털, 영화, 서비스, 식품안전 기준(염소 세척 닭 수입 금지 등) 등 핵심 분야에 대한 합의가 빠졌다는 점이다.
NYT, BBC 등은 “이번 합의가 자동차, 철강, 항공, 농축산 등 일부 산업에 단기적으로는 활력을 줄 수 있지만, 영국 경제 전반의 성장세를 견인하기엔 한계가 명확하다”고 꼬집었다. 미국에 대해서도 투자·소비심리 개선 효과가 일부 기대되지만, 근본적인 무역 불확실성은 해소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영국 산업계는 “자동차 수출 쿼터 초과분에 대해선 27.5% 고율 관세가 적용된다. 수출경쟁력 유지에 한계가 있다”며 추가 협상을 촉구했다. 영국 정부는 “추가 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NYT는 “미국이 영국에 우호적이어도 추가 양보엔 제한적일 것”이라며 “기본관세 10%도 유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문가들도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이 언제든 급변할 수 있다. 영국이 얻은 소위 ‘관세 선방’도 일시적일 수 있다”고 한목소리로 경고했다.
◇다음 협상은 중국…“英조차 제한적 양보, 기대 힘들어”
한편 미국과 영국의 합의를 지켜본 다른 국가들은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전 세계 주요 교역국들은 이번 영국과의 협정 내용을 통해 미국의 협상 방식을 가늠하고 있다”며 “관세율 10% 이상을 부과받은 국가들이 영국과 같은 수준으로 낮추는 협상을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짚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다른 교역국들이 참고할 만한 명확한 청사진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혹평했다.
미국의 다음 협상 대상으로는 중국이 거론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특별한 관계’를 강조한 영국에조차 제한적인 양보만 했다는 점에서, 중국이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