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AFP)
이날 뉴욕타임스(NYT) 등 미 언론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저녁 백악관에서 공화당 하원의원들을 만나 ‘파월 의장 해임 서한’ 초안을 꺼내 보여줬다고 보도했다. 암호화폐 법안과 관련해 마련된 회동에서 느닷없이 파월 의장 해임안이 등장한 것이다. NYT에 따르면 해당 서한은 내년 5월 파월 의장 임기 전 해임을 주장하는 윌리엄 J. 풀티 연방주택금융청장이 최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이날 미 국채 30년물 금리는 5%를 돌파했다. S&P500 지수와 나스닥지수는 장중 1%까지 낙폭을 키웠다. 트럼프 대통령이 곧바로 파월 의장 해임에 대해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진화에 나서자 시장은 다시 안정세를 되찾으며 강세로 전환했다. 그는 시장 반응을 의식한 듯 “내가 파월 의장을 해임하면 시장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있다”면서도 “파월 의장이 스스로 사임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장도 파월 해임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았다고 보는 모양새다. 마이클 페롤리 JP모간 미국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대통령의 파월 의장 해임 위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연준의 독립성이 약화되면 관세로 인한 인플레이션 상승 압력에 더해 기대 인플레이션 전망이 상승할 위험까지 더해질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장의 반응을 보기 위해 ‘파월 해임설’을 흘렸다는 시각도 있다. 티에리 위즈먼 맥쿼리 외환 및 금리 전략가는 “트럼프 대통령이 시장을 시험해 본 것일 뿐 심각하게 (파월 의장) 해임을 고려한 것은 아니다”며 “시장이 너무 많이 하락하면 그는 자신의 의견을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가 불리한 게임인 이유
미국 대통령에게는 범죄 등 ‘정당한 사유’ 없이 연준 의장을 임기 중 해임할 법적 권한이 없다. 연준의 독립성을 정치권력으로부터 보호해 금리가 시장 상황에 맞게 결정되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미국 역사상 연준 의장이 임기 중 대통령에 의해 해임된 전례는 한 번도 없다.
트럼프 행정부가 연준의 건물 보수 비용 25억달러(약 3조5000억원)가 지나치다며 논란을 키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금리 결정이나 신뢰 부족이 아닌 예산 비리를 이유로 파월 의장을 해임하면 향후 불거질 소송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는 계산이다. 기준 금리를 인하하지 않는 파월 의장을 비판해왔던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의원도 “건물 보수 공사 문제는 파월을 해고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파월 의장은 4년인 의장 임기가 끝나더라도 2028년 1월까지 연준 이사(임기 14년)로 남아 금리 인하에 제동을 걸 수 있다. 현재 총 7명의 연준 이사 가운데 파월 의장을 제외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이사는 2명 뿐이다. 내년 1월 아드리아나 쿠글러 이사의 임기가 종료되면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하는 이사는 3명으로 늘어난다. 파월 의장이 이사로 남을 경우 연준 이사회가 여전히 ‘바이든 임명 4명’ 대 ‘트럼프 임명 3명’ 구도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지하철역. (사진=AFP)
파월 해임 리스크가 시장을 뒤흔들자 제이미 다이먼 JP모간 최고경영자(CEO)에 이어 골드만삭스 등 미국 대형 은행 CEO들이 일제히 연준의 독립성을 지지하고 나섰다. 월가는 연준의 독립성이 훼손되면 미국 국채와 달러에 혼란을 줘 전 세계 자본 흐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왔으나 지금까지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은 자제해왔다.
전날 다이먼 JP모간 CEO는 월가에서는 처음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파월 흔들기’를 작심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연준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은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며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이먼 CEO에 이어 데이비드 솔로몬 골드만삭스·브라이언 모이니한 BoA·제인 프레이저 시티그룹 CEO 등은 이날 연준이 백악관 등의 정치적 간섭 없이 운영되는 것이 미 경제와 금융시장에 매우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들 CEO 4명이 관장하는 자산 규모는 12조달러(약 1경6600조원)가 넘는다.
솔로몬 CEO는 CNBC와 인터뷰에서 “중앙은행, 즉 연준의 독립성은 매우 중요하며, 우리는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이니한 CEO도 블룸버그와 인터뷰에서 “연준은 독립적인 기관이며, 행정부와 의회의 권한 밖에 있어야 한다”며 “연준이 업무 지시를 받고 감독을 받긴 하지만 실제로는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설계된 기관”이라고 강조했다. 프레이저 CEO도 성명을 내고 “연준의 독립성은 신뢰를 좌우한다”며 “자본 시장의 효율성과 미국 경쟁력에 매우 중요하다”고 밝혔다.
연준은 공공 기관이지만, 연준에 속해 있는 12개 지역 연방준비은행들은 민간은행들의 출자로 탄생한 특수 구조라는 점도 CEO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유다. 1907년 미국 대공황 이후 중앙은행의 필요성이 높아지자 JP모간 주도로 민간 은행들이 자본을 대 1913년 12개 지역의 연방준비은행을 출범시켰다. 일례로 뉴욕 연은은 JP모간과 시티그룹, 골드만삭스, 뱅크오브뉴욕멜론 등이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연준 이사회 멤버는 대통령이 지명하지만 지역 연은 이사회 멤버 일부는 민간 은행들이 선출한다. 민간 은행은 연은으로부터 배당을 받지만 주식을 사고 팔거나 담합하는 등의 영향력 행사는 제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