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車업계, 넥스페리아 사태로 ‘반도체 악몽’ 재현 우려

해외

이데일리,

2025년 10월 17일, 오후 04:06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글로벌 자동차 제조업계가 또다시 반도체 공급 차질 위기에 직면했다. 네덜란드 정부가 최근 중국계 반도체기업 넥스페리아(Nexperia)의 경영권을 직접 통제하기로 결정하며, 주요 고객사에 대한 칩 출하가 돌연 중단됐기 때문이다. BMW·토요타·폭스바겐 등 완성차 업체들은 “단 하나의 부품 결손이 전체 생산라인을 멈출 수 있다”며 바짝 긴장하고 있다.

(그래픽=게티이미지뱅크)


◇차량용 기본칩 생산 40% 점유…업계 공급망 비상

16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넥스페리아는 최근 주요 고객사들을 상대로 반도체 출하 중단을 통보했다. 유럽자동차제조업협회(ACEA)도 “넥스페리아로부터 중국과 네덜란드 정부 간 분쟁으로 반도체 납품을 더 이상 보장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관련 사실을 확인했다.

이번 사태는 네덜란드 정부가 지난달 사상 처음으로 ‘필수재 공급법’(Goods Availability Act)을 발동, 넥스페리아 경영 전반을 국가 통제 하에 두면서 시작됐다. 필립스 반도체 사업부에서 분사한 넥스페리아는 2018년 중국 기업 윙테크(Wingtech) 테코놀로지에 인수됐다. 모회사는 중국 기업이지만, 네덜란드에 본사를 두고 있어 네덜란드 법을 따라야 한다.

필수재 공급법은 반도체 등 필수 산업기술·상품이 해외 세력에 위협받는 비상 상황에 대비해 정부가 기업 경영권 등을 통제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한다. 기업 소유권을 직접 인수하는 것은 아니다.

네덜란드 정부는 넥스페리아의 심각한 경영 부실 및 핵심 반도체 기술의 중국 모회사 이전 가능성을 문제 삼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유럽 내 핵심 반도체 기술과 생산 능력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며 ‘불가항력’(Force majeure) 조항을 근거로 기존 납품계약을 유보했다고 설명했다. 유럽연합(EU)도 이번 조치가 “유럽 기술 주권을 강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네덜란드 정부가 필수재 공급법을 발동한 것은 미국이 최근 수출통제 규정을 개정한 영향이다. 넥스페리아 모회사인 윙테크는 지난해 12월 미 상무부의 대(對)중국 수출제한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는데, 개정안에선 제재 대상 기업이 50% 이상 지분을 가진 해외 자회사에도 동일한 규제를 적용토록 하고 있다. 미 정부는 관련 규정 개정 이후 네덜란드 정부를 강하게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넥스페리아는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 등 차량용 기본소자 시장의 약 40%를 점유하고 있다. 이 회사의 제품은 BMW, 메르세데스-벤츠, 토요타, 폭스바겐, 스텔란티스 등 주요 완성차 업체의 조명 시스템과 전자제어장치(ECU)에 사용된다. 업계 관계자는 “넥스페리아의 부품은 대부분의 자동차 전자기기 회로에 필수적”이라며 “작은 트랜지스터 하나만 없어도 생산라인 전체가 멈춘다”고 토로했다.

이에 제너럴모터스(GM), 토요타, 폭스바겐, 현대자동차 등 글로벌 자동차 제조업체 대부분을 회원으로 두고 있는 미국 자동차혁신연합(AAI)은 긴급 성명을 내고 조속한 사태 해결을 촉구했다.

개별 기업별로도 대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GM은 1차·2차 협력업체를 대상으로 넥스페리아 제품을 얼마나 사용하고 있는지 긴급 설문을 실시했으며, BMW와 폭스바겐 등은 공급망 노출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긴급 회의를 개최했다.

사진=AFP


◇美 관세 vs 中 희토류 규제 속 반도체 공급난 데자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100% 대중 관세 예고 및 중국의 희토류 수출 제한으로 공급망 불안이 커지는 가운데, 이번 넥스페리아 사태는 자동차 산업 전반에 또 한 번의 반도체 쇼크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글로벌 자동차 업계는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반도체 공급난으로 수백억달러 규모의 피해를 입었다.

이후 업계는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해왔으나, 넥스페리아 제품의 경우 80%가 중국 내에서 패키징·테스트를 마친 뒤 출하돼 대체 조달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토요타는 최근 “일부 협력업체로부터 중국 내 공장에서 제품을 내보내지 못한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넥스페리아 물류 차질이 원인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유럽 완성차 업체들은 아예 중국 정부를 향해 “넥스페리아 수출 제한을 완화하고 네덜란드와의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하고 나섰다. 여기엔 보쉬, 오무비오 등 부품 공급업체들도 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자동차 부품협회(MEMA)의 콜린 쇼 회장은 “이번 사태는 공급망의 취약성을 여실히 보여준다”며 “대체 공급망 가동에 수주 이상 걸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반도체 공급망 갈등이 장기화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윙테크는 주주 공지를 통해 “기본적인 생산·유통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고객 및 공급망과 협의중”이라며 법적 조치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회사의 주가는 네덜란드 정부의 통제 조치 발표 이후 상하이증시에서 하루 만에 10% 급락했다.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