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는 17일(현지시간) 익명의 월가 전문가를 인용해 “기업들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찍힐 이유만 만들지 않으면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기업이 너무 크거나, 너무 눈에 띄거나, 관세에 너무 취약해 투명인간처럼 지낼 수 없는 경우 아첨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월가 거물급 딜메이커로 소개된 이 소식통은 “기업들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처벌 대상으로 찍히는 것뿐 아니라, 칭찬을 받기 위해 지목되는 것도 피하길 원한다. 칭찬이 언제든 비난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팀 쿡(왼쪽) 애플 최고경영자(CEO)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AFP)
◇트럼프 2기 경영환경 개선됐지만…CEO들은 “죽을맛”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지 1년이 가까워지면서, 그의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도 솔솔 나오기 시작했다.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6일 미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잠들었다가 오늘 깨어났다고 가정했을 때 결과만 놓고보면 미국의 상황은 매우 나아졌다고 짚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은 다른 국가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법인세가 낮아지고 미 재무부와 상무부를 월가 출신들이 장악해 기업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규제가 대폭 완화해 인수·합병(M&A) 환경이 개선돼, ‘합병의 월요일’(merger Mondays)이 돌아왔다는 평가와 함께 메가딜이 잇따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또 전 세계 모든 국가에 부과한 보편관세 10%는 예상보다 높을 수 있겠지만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도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으며,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예상대로 금리를 내렸다고 전했다. 기업·개인 모두 관세에 대한 불만을 상쇄할 만큼 금융자산이 불어났고, 이자 부담도 완화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어떻게 이르렀는지 과정을 살펴보면 기업이나 CEO 입장에서 얼마나 고충이 큰 지가 확인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준 의장 및 이사 해임을 시도하고,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MS) 등 민간기업 임원에 대해 해고를 압박했다. 또 못마땅하게 여기는 로펌들에는 친(親)마가(MAGA) 사건들을 무상 수임토록 강요했다.
심지어 미 정부는 일본 자본에 US스틸을 넘기는 대신 전략적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골든 셰어’를 보유하고 있다. 정부 보조금을 대가로 인텔 지분 10%도 확보했고, 엔비디아와 AMD에는 대중 반도체 판매 수익 15%를 떼어 가겠다고 요구했다.
이코노미스트는 “관세도 모든 교역국을 상대로 지난 4월 일괄 인상한 뒤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올렸다 내렸다 했다. 어둠 속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았다. 깨어있는 채로 이 모든 과정을 버텨야 했던 CEO들이 안쓰러워질 지경”이라고 평가했다.
◇관세·규제 때문에 어쩔수 없이 기부 행렬…애플 대표적
‘침묵 또는 아첨’ 전략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대응이기도 하다. 관세 노출이 극심한 애플이 어쩔 수 없이 아첨을 택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팀 쿡 CEO는 지난 8월 미국에 1000억달러를 추가 투자하겠다는 약속을 재확인하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금으로 된 장식물을 선물했다. 당시 일각에선 “아무리 수익 때문이라지만 민망하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아울러 애플 경쟁사인 빅테크 4곳을 포함해 최소 20개 기업이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는 3억달러짜리 백악관 볼룸(연회장)에 기부금을 냈다. 철도회사 유니언퍼시픽의 경우 미 동부지역 철도사인 노퍽서던을 850억달러에 인수하는 과정에서 정부 승인을 받기 위해 기부에 동참했다. 기부금을 낸 일부 CEO들은 이러한 관행에 혐오감을 드러내면서도 “원래 그런 거다. 어쩔수 없는 CEO의 삶”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특혜를 사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이유로 기부 방식은 거절하고, 다른 방식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사려는 기업들도 있다. 미 최대 은행인 JP모건체이스는 안보 증진을 위해 1조 5000억달러 투자를 약속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도 중요하게 여기는 의제인 동시에, 외부엔 아첨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은행은 조 바이든 전 정부 시절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기후친화적 투자에 2조 5000억달러를 약속한 바 있다.
일론 머스크(왼쪽)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AFP)
◇보복 당한 머스크 보고 화들짝…대다수 기업은 ‘침묵’
하지만 아첨 전략은 리스크도 크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트럼프 대통령과 전례 없이 친밀한 관계를 구축했으나, 지난 6월 충돌을 빚은 뒤 보복을 당했다. 트럼프 1기 때에도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가 트럼프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다가 정부 계약과 관련해 불이익을 받았다.
이에 트럼프 행정부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아예 금기시되는 분위기다. 기업들은 경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책에 관행적으로 제출해 왔던 ‘공식 의견서’(amicus brief)를 더이상 내지 않고 있으며, 공개적인 반대 발언도 삼가고 있다. 대신 법적 소송을 통해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CEO는 “CEO들은 한목소리로 보복보다 예측 불가능성이 더 두렵다고 한다. 트럼프 정부가 정책을 건건이(deal by deal) 만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 CEO는 “기업들이 더 나은 제품을 만드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관세 면제를 따내고, 거절할 수 없는 정부 제안에 어떻게 대응할지 머리를 쥐어짜고, 아예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는 방법을 찾는 데 에너지를 쏟고 있다”고 토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