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비영리 기관 스타트업 네이션 센트럴의 알론 투르카스파 이사가 이스라엘 스타트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가자 평화협정 체결 후 ‘포스트 워(post-war) 경제’ 정상화에 속도를 내고 있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바로 ‘이노베이션’(혁신)이었다. 이스라엘 경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스타트업뿐 아니라, 텔아비브에 있는 카르멜 재래시장에서도, 군부대와 병원 시설에서도 ‘혁신’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이어져다.
한국 기자단은 지난 2~7일(현지시간) 이스라엘 정부 초청으로 이스라엘 경제의 중심축인 텔아비브와 종교 도시인 예루살렘, 여전히 전쟁의 불씨가 남아 있는 가자지구 인근 남부 키부츠인 니르 오르와 북부 하이파 지역을 다녀왔다.
방문 마지막날인 7일 텔아비브 중심가에 위치한 비영리 기관 ‘스타트업네이션 센트럴(SNC)’에서도 혁신이 답이란 메시지가 반복됐다. 브리핑을 맡은 알론 투르카스파 글로벌파트너팀 이사는 “전쟁 중에도 이스라엘 스타트업은 생태계를 멈추지 않았다”며 “혁신은 멈출 수 없는 국가적 본능”이라고 말했다. 전투에 동원된 창업자나 엔지니어가 “전선에서 노트북을 열고 일을 계속한 사례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스라엘 SNC에 따르면 인구가 1000만명 정도인 이스라엘은 현재 스타트업이 7000개가 넘는다. 이 중 10억달러(약 1조3000억원)가 넘는 기업가치를 가진 유니콘 기업만 최소 42곳에 달한다. 스타트업 2000개가 안되는 한국에 비해 3배가 넘는 규모다. 더구나 글로벌 기업 450곳 이상이 이스라엘에 연구개발(R&D) 조직을 두고 있을 정도다. 한국에서도 삼성, LG 등이 R&D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투르카스파 이사는 “지난 2년간 전쟁 상황에서도 글로벌 기업들의 연구&개발(R&D)센터가 공식적으로 철수한 곳은 단 3곳뿐”이라고 전했다.
이스라엘의 ‘하이테크 생태계’가 고밀도라는 사실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모든 산업 노동인구 중 12%가 하이테크 종사자이며, 국가 수출의 절반 가까이를 하이테크 산업이 차지한다. 특히 텔아비브 인근 5km 반경 안에 글로벌 기업과 스타트업, 대학 연구소, 인큐베이터, 벤처캐피털(VC) 등이 100곳 넘게 모여 있는 ‘초밀집 구조’는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문 형태다. 투르카스파 이사는 “이스라엘이 수출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지식, 재능, 기술을 결합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텔아비브 비영리 기관 스타트업 네이션 센트럴 내부 모습
이스라엘의 강점은 ‘전쟁에도 흔들리지 않는 생태계’라는 점이다. 코로나와 2023년 10·7 전쟁 이후에도 하이테크 고용률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전쟁 직후 정부는 스타트업 연쇄 도산을 막기 위해 2000억원(200 million 달러) 이상을 한 달 만에 긴급 투입했다. 투르카스파 이사는 “전쟁으로 현금 흐름이 끊기면 2~3개월 안에 수많은 회사가 쓰러지는데, 이는 20년 넘게 쌓아온 생태계 전체를 잃는 것”이라며 “정부가 직접 돈을 넣는 결정을 한 것은 생태계 유지가 국가 안보만큼 중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혁신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직문화도 독특하다. 이스라엘 군대의 ‘디브리핑(debriefing)’ 문화는 스타트업의 수평적 구조와 직설적 피드백 문화에 그대로 이어진다. 군에서는 임무가 끝난 뒤 계급과 무관하게 모두가 참여해 잘된 점·잘못된 점을 거침없이 공유한다. 그는 “상관을 향한 비판도 자연스럽고, 중요한 것은 솔직함을 통한 다음 임무의 개선”이라며 “이 문화가 기업에서도 빈번한 토론, 빠른 실패, 빠른 수정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기업 회의에서 “직급 상관없이 말을 끊고 바로 의견을 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덧붙였다.
대표적인 이스라엘발 기술도 곳곳에서 글로벌 산업의 표준이 됐다. USB와 플래시메모리를 만든 샌디스크(SanDisk), 알약처럼 삼켜 촬영하는 ‘캡슐 내시경’, 내비게이션 앱 ‘웨이즈(Waze)’, 자율주행 기술기업 ‘모빌아이(Mobileye)’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세포 기반 우유 단백질 개발, 대체 단백질, 워터테크 등에서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내놓고 있다.
전쟁 중에도 빠르게 성장하는 기업들도 있다. 클라우드 보안기업 위즈(Wiz)는 설립 4년 만에 320억달러 규모 인수 제안을 받았다. 사이버, 핀테크, 기후테크 등 분야에서도 글로벌 유니콘이 속속 나오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기업의 엑시트가 곧 기술 유출이라는 우려는 과장”이라며 “매각된 뒤에도 R&D 인력의 절반 이상이 이스라엘에 남아 글로벌 기업의 현지 R&D센터로 확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스라엘 스타트업이 빠르게 성장한 또 하나의 배경은 ‘한우물 파기’보다 ‘여러 산업을 옮겨 다니며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구조’에 있다. 알론 본인도 반도체 → 농업센서 → 기후·에너지 테크로 커리어를 이동했다. 그는 “이스라엘에선 한 산업만 평생 파는 사람이 더 드물다”며 “섹터가 달라도 문제 해결력과 도전 정신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스타트업 생태계를 지탱하는 핵심은 결국 사람과 문화다. 상하 계층문화가 많지 않고 보고 체계가 짧으며, 실패를 낙인으로 보지 않는 환경이 창업 재도전을 가능케 한다. 정부 보조금도 한 프로젝트당 100만달러까지 제공되며, 실패해도 상환 의무가 없다. 투르카스파 이사는 “실패는 오히려 투자자들에게 ‘이 사람은 실제로 한 번 부딪쳐 본 사람’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