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타임스(FT)는 25일(현지시간) “높아진 식료품 가격·임대료·의료비가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다. 저소득층은 생필품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며 미 펜실베이니아주 베들레헴과 인근 리하이밸리 지역 주민들의 고된 생활상을 전했다. 이어 “이 지역에선 생계를 유지할 만큼의 돈을 버는 일도 힘들어졌다. 이러한 불안감은 분열된 미국 경제 전반의 정서를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사진=AFP)
◇“바닥 꺼졌다…생계 유지비도 벌기 힘들어”
베들레헴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애니사 카마초(26)는 임대료가 너무 올라 최근 조부모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는 “솔직히 모든 게 우리를 조여 오는 느낌이다. 나와 남자친구는 투잡을 뛰고 있는데, 마치 부스러기만 긁어모으고 있는 기분”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창고에서 일하는 드미트리 내시(32)는 “주당 72시간 넘게 일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한다. 선택이 아니다. 생활비가 늘어 필수다. 식비를 절약하려고 끼니도 줄였다. 음식 때문에 이런 상황이 되는 건 말이 안 된다. 먹기는 해야 하지 않느냐”고 토로했다.
베들레헴에서 무료 급식소 ‘뉴 베서니’(New Bethany)를 운영하는 마크 리틀(52)은 “사람들이 너무 지쳐 있고,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지금처럼 필요한 게 많았던 적이 없다. 바닥이 꺼지고 있다. 작년만 해도 이런 상황이 올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며 “임대료를 못 내거나 교통사고로 의료비를 갚지 못해 퇴거당한 사람들을 많이 보인다. 이런 유형의 ‘경제적 노숙 상태’가 앞으로 훨씬 더 흔해질 것으로 본다”고 우려했다.
리하이밸리 지역에선 부유층과 서민층 간 격차가 커지며 불만이 쌓이고 있다. 부자들은 부동산·주식시장 호황을 누리는 반면, 저소득층은 물가 상승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이 지역 행정책임자인 라몬트 맥클루어는 “산업화 이후의 미국이 어떤 모습이 될지 보여준다. 리하이밸리 경제 규모는 이제 일부 주(州)를 넘어설 정도지만, 여기서 살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도 많다”고 전했다.
◇생활비 위기 심화에도 트럼프 저소득층 지원 축소
미 전역에서는 지난 5년간 물가 급등이 이어졌다.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2022년 9%에서 3%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누적된 비용 부담이 저소득층을 극도로 압박하고 있다고 FT는 설명했다.
특히 주택 문제가 심각하다는 진단이다.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연은)은 2021년 이후 주택 가격 중간값이 3분의 1 넘게 올라 거의 40만달러에 근접했다고 추산했다. 주거비가 가계 소득의 30%를 넘지 않아야 ‘감당 가능한 수준’이라고 간주했을 때, 가구당 연 12만달러 이상의 소득이 필요하다. 하지만 미국의 중간 가구소득은 8만 5000달러에 불과하다.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다. 9월 미국 실업률은 4.4%로 4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 상승률은 2022년 이후 절반 이하로 줄어 3.6%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저소득층 대상 식료품 및 의료비 지원마저 줄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한 대규모 예산안 발효로 내년부터는 연방 식품보조프로그램 ‘스냅’(SNAP) 및 저소득층 의료보조(메디케이드) 수혜자가 대폭 줄어들 전망이다. 현재 미 전역의 스냅 이용자는 4200만명에 달한다. 의료비는 올해 말 ‘오바마케어’(ACA) 의 세액공제가 만료되면 연간 보험료가 평균 1000달러 이상 오를 가능성이 있다.
두 딸과 베들레헴에 거주하는 아이달리스 마르티네스(26)는 건강 문제로 실직한 뒤 현재 스냅에 의존하고 있는데, 지난달 연방정부 셧다운으로 지원이 일시 중단돼 고초를 겪었다. 그는 “식료품값이 터무니없다. 그밖에 표현할 말이 없다. 아이들 다음 끼니를 챙길 수 있을지 걱정된다. 정말로 두렵다”고 말했다.
해고된 지 4개월 된 기계공 토마스 아베난테(46)는 60건이 넘는 일자리에 지원했지만 면접조차 잡지 못했다. 그는 “2만달러였던 저축이 절반으로 줄었다. 월마트 같은 대기업이 막대한 이익을 내면서도 직원들이 푸드스탬프를 받아야 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지난 9월 1일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노동절 ‘억만장자 노동자’ 집회에서 한 시위 참가자가 “왕은 없다”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사진=AFP)
◇물가 완화 실패로 여론 악화…트럼프 지지율도 ‘뚝’
심화하는 생활비 위기와 경기둔화는 트럼프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대다수 여론조사에서 물가 상승은 미국인들의 최대 관심사다. 최근 리얼클리어폴리틱스 여론조사에서도 트럼프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긍정 답변은 1월 51%에서 43%로 하락했고, 경제 분야 지지율은 더 낮은 40%에 그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미 대선에서 생활비 위기 해결을 공약으로 앞세워 당선됐지만, 그가 취임한 올해 1월과 현재의 인플레이션 수준은 큰 차이가 없다. 또 여전히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목표를 크게 웃돈다.
그 결과 이달 초 치러진 뉴욕 시장 및 뉴저지·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민주당이 싹쓸이 승리를 거뒀다. 트럼프 2기 집권 이후 처음 치러진 지방선거이자 내년 중간선거의 전초전 성격이어서 공화당 내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쇠고기·커피 등 일부 식료품 관세를 인하했고, 의약품 가격 인하를 위한 제약사와의 협상 및 휘발유 가격 인하를 위한 석유 생산 확대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그는 자신이 물가를 낮췄다고 주장하지만, 미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전국 식료품 가격은 여전히 상승 중이다. 쇠고기 가격은 지난해보다 14%나 올랐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의 오랜 측근이었던 마조리 테일러 그린 조지아주 연방 하원의원은 “국민들을 가스라이팅하고 있다”며 반대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는 “직접 장을 보는 국민들은 식품 가격이 얼마나 비싼지 안다”며 내년 1월 사임을 예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린 의원을 “배신자”라고 낙인찍었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데 정치는 무슨”…민주당도 외면
민주당도 생활비 위기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하지만, 미 유권자들의 기억에는 조 바이든 전 정부 시절 인플레이션도 큰 악몽으로 남아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선전하고도 민주당 지지율은 34%로 사상 최저를 기록했다.
베들레헴 인근 푸드뱅크에서 식료품을 배급받은 티파니 체이스(43)는 “정치인들은 싸우기만 한다. 그게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며 “정치를 이렇게까지 싫어한 적은 없다”고 비난했다. 지역 노숙인 쉼터를 운영하는 앤드루 두프(45)도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닫고 있다. 정치는 내 현실과 너무 멀다. 내가 오늘 일을 못 나가면 30일 안에 삶 전체가 무너질 것”이라고 거들었다.
꽃집을 운영하는 카마초 역시 “지난해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카멀라 해리스에게 투표했지만, 지금은 정치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그 누구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근로자를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데, 투표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