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기부 문화 빠르게 사라지는 중"…트럼프 때문?

해외

이데일리,

2025년 12월 24일, 오전 11:29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매년 연말이 되면 미국인들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고 외식을 즐기면서 자선적으로 변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올해 기부자 수는 과거보다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많은 이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삶이 팍팍해졌기 탓이라며 책임을 돌리고 있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고 이코노미스트가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사진=AFP)
기부금 데이터를 분석·제공하는 ‘기부 모금 효율성 프로젝트’(FEP)에 따르면 올해 첫 9개월 동안 미국 내 기부자 수는 전년 동기대비 약 3% 감소했다. 이로써 자선단체들은 5년 연속 기부자 명단 축소에 직면하게 됐다.

핵심 축인 부유층 사이에서도 기부 습관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 조사에 따르면 순자산 100만달러(약 14억 7000만원) 이상 가구의 기부 비율은 2015년 91%에서 지난해 81%로 떨어졌다.

새로운 초부유층은 대체로 젊은 기술 창업자들로 아직은 재산을 쌓는 데 집중하고 기부에는 관심이 적다. 또 실리콘밸리의 대표 기부 캠페인 ‘효과적 이타주의’(EA)는 주요 후원자인 샘 뱅크먼-프리드가 사기 혐의로 수감된 뒤 크게 위축됐다. EA의 총 기부액은 2022년 10억달러(약 1조 4635억원)를 웃돌았지만 올해는 8억 6300만달러(약 1조 2633억원)로 줄었다.

이는 비영리단체들의 재정 압박을 심화시키고 있다. 인디애나대 연구를 기반으로 한 연례 보고서 ‘기부 USA’(Giving USA)에 따르면 개인·기업·재단·유산을 포함한 미국 내 총 기부액은 지난해 실질 기준 3.3% 증가한 약 5900억달러(약 863조 7600억원)에 그쳤다. 이코노미스트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감소한 뒤 미약한 반등”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결정 및 발언이 기부 감소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원조기구 폐쇄를 결정했고, 이에 따라 다른 부유한 국가들도 조용히 원조를 삭감하는 추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최대 공여국들의 공적개발원조가 6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일부 자선단체를 낭비적이고 정치적이라고 비난하며, 기후변화·고등교육·다양성 같은 의제를 ‘반(反) MAGA’로 규정했다. 아울러 백악관은 지난 9월 보수 활동가 찰리 커크가 살해당하자 테러 지원 혐의를 받고 있는 자선단체와 재단 등을 “해체하고 뿌리를 뽑으라”고 법 집행기관에 지시했다.

같은 달 미 법무부는 조지 소로스가 지원하는 오픈 소사이어티 재단을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뉴욕대의 태드 칼라브리세는 “이제 미국에서 특정 프로젝트에 기부하는 것은 등에 과녁을 붙이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올해만 놓고 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영향이 적지 않지만, FEP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자선 기부율은 최소 10년 전부터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지 않았던 시기에도 감소 추세가 이어졌다.

생활비 부담에 대한 불안이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지난 10년간 실질 임금은 상승했지만 미국인들은 여전히 생활비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맥킨지의 11월 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가량이 물가 상승을 걱정했고, 약 4분의 1은 생계 유지에 불안을 느꼈다.

지난해 미국인들이 기부하지 않은 가장 흔한 이유는 “감당할 수 없어서”로 조사됐다. 언락 에이드의 월터 커는 “생활비 우려 때문에 미국 중산층은 더 이상 기부에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종교적 신념 쇠퇴도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진단이다. 미국에선 높은 신앙심이 오랫동안 풍부한 기부 문화를 뒷받침해왔다. 많은 종교는 신도들에게 십일조(기독교), 자카트(이슬람교), 마아세르(유대교)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부와 관대함을 가르친다.

그러나 갤럽 조사에 따르면 종교 단체에 대한 기부금은 지난해 전체 기부금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기부금 대부분을 차지했던 1980년대 후반과 대비된다. 미국 내 종교 단체 기부는 조사 대상 국가들 중 가장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비영리 자선단체들은 ‘더 적은 기부자들로부터 더 많은 기부’에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다. 극소수 ‘큰 손’ 기부자들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FEP에 따르면 첫 9개월 동안 5만달러 이상 기부자 비중은 0.4%에 불과했으나, 기부액은 50% 이상을 차지했다.

일부 유명 기부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에 대응해 기부액을 늘리기도 했다.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은 향후 20년간 2000억 달러를 지출한 뒤 문을 닫겠다고 발표했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의 전 부인인 맥켄지 스콧은 올해 70억달러를 기부했다.

하지만 이런 초대형 기부자들이 일반 대중들의 기부를 독려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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