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핑크 블랙록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4월 “내가 만나는 대부분의 CEO들은 우리가 이미 경기 침체에 들어갔다고 느낀다”고 말했지만, 현실의 미국 경제는 관세 압박 속에서도 고성장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금융시장과 기업 현장에서는 관세가 단기 충격을 주긴 했지만, 경제 전반의 방향을 바꿀 만큼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하지는 않았다는 평가가 확산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AFP)
미국 경제는 ‘폭망’도 ‘대반전’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서 있다. 미 상무부가 지난 23일(현지시간) 발표한 올해 3분기 국내총생산(GDP·속보치)은 전분기 대비 연율 4.3% 성장해 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시장 예상치(3.2%)를 크게 웃돌았다.
이는 의료·여행 등 서비스 소비와 레저용 차량 지출 증가가 반영된 결과다. 특히 개인소비지출은 연율 기준 3.5% 증가해 전 분기(2.5%)보다 성장 폭이 확대됐다. 소비는 미국 경제 성장의 가장 큰 엔진으로, 이번 분기 성장의 상당 부분을 떠받쳤다.
정부 지출·재고·무역 변동성을 제외한 민간 최종 수요 지표도 개선됐다. 기업과 가계의 기저 수요를 보여주는 ‘민간 국내 최종판매’는 3% 증가해 1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트럼프 관세로 무역과 재고 변동이 GDP를 왜곡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 지표가 높은 수준을 유지한 것은 미국 경제의 체력이 여전히 견조하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고용 상황도 경기 침체를 단정할 단계는 아니다. 관세가 즉각적인 고용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9월 비농업 고용은 11만9000명 증가해 시장 예상치를 웃돌았고, 실업률은 4.4%로 상승했지만 급격한 침체 신호라기보다는 완만한 둔화 국면이다. 이는 기업들이 대규모 해고보다는 채용을 멈추고 관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정책이 대규모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해왔지만, 제조업 고용은 오히려 감소했다. 중국산 부품에 높은 관세가 부과되면서 일부 제조업체는 공장을 닫거나 인력을 줄였다.
물가 역시 연초의 경고만큼 치솟지 않았다. 관세로 가구·가전·일부 식료품 등 수입재 가격은 올랐지만,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최근 수개월간 2% 후반대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관세의 영향이 제한적인 품목에 집중된 데다, 주거비와 에너지 가격이 안정된 흐름을 보인 영향이 컸다. 월마트의 존 데이비드 레이니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최근 실적 발표에서 “가격 인상이 소비자에게 전가되는 속도와 규모가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래픽=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4월 ‘해방의 날(Liberation Day)’을 선언하며 전면적인 관세 인상을 단행했을 당시 우려됐던 시나리오와는 다소 다른 전개다. 당시 월가와 학계에서는 고율 관세가 기업 비용을 끌어올리고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켜 경기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관론이 우세했다.
전문가들은 관세의 효과가 과거처럼 즉각적이고 직선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을 첫 번째 이유로 꼽는다. 실제 경제에서는 기업과 소비자의 대응이 충격의 경로를 끊임없이 수정했다. 기업들은 관세 인상 직후 가격을 곧바로 올리기보다 기존 재고를 소진하고, 중국 대신 관세 부담이 낮은 국가로 수입선을 전환했다. 그 결과 명목 관세율은 2~3% 수준에서 15.8% 안팎으로 급등했지만, 실제 기업과 소비자가 체감한 부담은 분산됐다. 미 조세 분야 싱크탱크인 택스 파운데이션은 가중 평균 적용 관세율이 15.8%로 올랐지만, 실효율은 11.2%에 그쳤다고 추산했다.
정책 불확실성도 충격을 완화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고율 관세를 위협했다가 협상 국면에서 이를 낮추는 방식을 반복했다. 관세의 최종 수준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들이 가격 전가와 투자 결정을 미루면서 단기적인 물가 충격이 제한됐다는 분석이다.
무엇보다 경제성장률 전망을 빗나가게 한 결정적 변수는 인공지능(AI) 투자를 중심으로 한 민간 투자 확대였다.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소프트웨어 분야 투자가 급증하면서 관세 부담을 상당 부분 상쇄했다. 월가 투자은행 바클레이는 올해 상반기 AI 관련 투자가 GDP를 연율 기준 0.8%포인트 끌어올렸다고 추정했다. AI 관련주 급등에 따른 주식시장 상승은 자산 효과를 통해 소비를 지탱했고, 이는 3분기 GDP 지표에서도 확인됐다.
물론 관세의 충격이 아직 완전히 소멸됐다고 보기는 이르다는 신중론도 있다. 에버코어 ISI의 크리슈나 구하 부회장은 “일부 관세 유예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기 침체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며 “관세와 다른 정책 변수들이 누적적으로 작용할 경우 중장기적으로 경제 성장 경로에 리스크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