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 답답해서"…케데헌 열광한 미국인들, 한국어 배운다

해외

이데일리,

2026년 2월 01일, 오후 05:51

[이데일리 성주원 기자]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 훨씬 쉬울 텐데…”

35세의 브레켄 힙은 넷플릭스에서 한국 게임쇼를 보다가 자막에 좌절감을 느꼈다. 결국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 서부 어바인의 게임 회사에서 일하는 그는 이제 주당 6~8시간을 한국어 공부에 쓴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뉘른베르크 토이 페어에서 마텔 부스에 전시된 ‘K팝 데몬 헌터스’ 완구 시리즈 피규어들. (사진=로이터)
31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한국 대중문화에 빠진 미국인들이 한국어 학습에 뛰어들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히트곡 ‘골든’을 따라 부르려는 것이 시작이었지만, 이제는 본격적인 한국어 학습 열풍으로 번지고 있다.

언어 학습 애플리케이션(앱) 듀오링고는 작년 1년 동안 미국에서 한국어 학습자가 22% 증가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아칸소에 이르는 대학들은 한국어 강좌를 확대하고 있다. 언어 교육 기관들도 교사 모집에 나섰다.

캘리포니아 어바인의 비영리 언어 교육 기관인 한미센터의 태미 김 전무이사는 “수요를 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자랐지만 학생들이 케이팝을 더 많이 안다”

메릴랜드주 그린벨트의 엘리너 루스벨트 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밥 허 씨는 놀라운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대부분 흑인과 라틴계인 학생들이 기본 문구와 속어를 이미 알고 입문 수업에 온다.

허씨는 “나는 한국에서 자랐지만, 그들이 나보다 케이팝에 대해 더 많이 안다”며 “이제는 학생들을 따라가려고 매일 케이팝을 듣는다”고 말했다.

한류는 2012년 래퍼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유튜브 조회수 10억회를 돌파하면서 미국에 본격적으로 상륙했다. 이후 방탄소년단(BTS)은 축구 경기장을 매진시키고 블랙핑크는 코첼라에서 헤드라이너로 공연했다. 영화 ‘기생충’은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최초의 비영어권 영화가 됐다. ‘오징어 게임’ 시즌 1은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많이 본 쇼가 됐다.

외국어에 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한국어 수요 급증은 더욱 눈에 띈다. 현대언어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과 2021년 사이 대학의 외국어 과목 등록은 16% 감소했다. 같은 기간 한국어는 38% 급증해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한국어 프로그램을 감독하는 박정희 씨는 “20년 전에는 한국계가 아닌 학생을 위한 한국어 수업이 2개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9개로 늘었고, 그중 8개가 한국어를 처음 접하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라며 “2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 2022년 4월 3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 MGM 그랜드 가든 아레나에서 열린 제64회 그래미 어워즈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한 한국 보이그룹 방탄소년단(BTS) 모습. BTS는 오는 4월 약 4년 만의 첫 월드투어를 시작할 예정이다. (사진=AFP)
◇“매일 문법 연습 안 하면 진도 못 따라가”

한국어는 한글 자모를 익히는 데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아 시작은 쉽다. 하지만 유창해지려면 수년간의 헌신이 필요하다. 한국어는 영어와 문장 구조가 다르고, 나이와 가족 관계에 따라 문법과 단어가 변한다. 미 국무부는 한국어를 아랍어, 중국어, 일본어와 함께 영어 사용자가 배우기 가장 어려운 언어 중 하나로 지정했다.

브라운 대학교 3학년인 리사 헌트(20)는 5학기 동안 한국어를 공부했다. 응용 수학-경제학을 전공하는 그는 “매 학기마다 항상 가장 어려운 수업”이라며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매일 문법과 어휘를 연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콘서트에서 케이팝 공연자들이 말할 때 이해한다는 것에 놀란다.

듀크 대학교 4학년인 에인절 황(22)은 케이팝 팬들과 더 잘 연결되기 위해 고등학생 때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게 한국어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섰다.

황씨는 “한국 역사와 정치에 대해서도 더 깊은 이해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며 북한 이탈주민 관련 프로그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그는 한국어를 부전공하고 있다. 그는 “솔직히 케이팝과 한국 미디어에 빠지지 않았다면 아마 같은 길을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많은 학습자들에게 한국 방문은 다음 단계다. 틱톡 팔로워 130만명을 보유한 인플루언서 맥스 에이브럼스(27)는 서울에서의 삶을 기록하며 한국어로 현지인들을 놀라게 하는 콘텐츠로 유명하다. 고등학교 때 케이팝 그룹 소녀시대를 처음 들으면서 한국어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국제 관계와 한국어 복수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 한국으로 이주했다.

최근 미국으로 돌아온 에이브럼스는 “한국어를 배우는 즐거움은 사회·문화적 경험에 있을 뿐, 직업적 커리어로 연결시키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어에 능통한 외국인도 비자 문제와 문화적 장벽 때문에 한국에서 지속 가능한 삶을 구축하기는 어렵다는 설명이다.

◇“이제 한국어 섞어 써도 아무도 놀라지 않아”

한국계 미국인 앤디 고(21)는 흥미로운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한국에서 시카고 교외로 이사한 후 그는 한국 드라마나 케이팝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대학 3학년인 그는 다른 학생들과의 대화에 한국어 단어를 섞어 넣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솔직히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시애틀에 사는 과학자 앰버 가이드리(37)는 한국 배경이 전혀 없지만 2년 전 한국 드라마에 매료돼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이제 그는 한인 마트 체인 H마트에서 쇼핑하고 떡볶이와 김치찌개를 만들며 한국 화장품을 사용한다.

가이드리가 여자 친구들과 함께 큰 화면으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봤을 때 극장은 어린이와 어른들로 가득했고 일부는 코스프레 의상을 입고 있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거의 모든 사람이 ‘골든’을 따라 불렀다. 가이드리는 올 봄 첫 서울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가상 걸그룹 헌트릭스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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