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핵위협 시대 온다…미·러 마지막 핵군축 조약 오늘 만료

해외

이데일리,

2026년 2월 05일, 오후 07:19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미국과 러시아 간 마지막 핵군축 협정인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뉴스타트)이 5일(현지시간) 만료된다. 1972년 이후 이어져 온 미·러 간 핵군비 통제 체제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전 세계적인 군비 지출 확대 기조와 맞물려 핵개발 경쟁이 다시금 본격화할 것이란 전망이 잇따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AFP)
◇푸틴 연장 제안에 美 무응답…트럼프 “中 포함해 새 판 짜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러시아 외무부는 이날 성명을 내고 “협정을 12개월 더 연장하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제안에 미국이 응답하지 않았다”며 유감을 표했다. 이어 “뉴스타트가 만료되더라도 러시아는 책임 있고 신중하게 행동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러시아 외무부는 또 “국가안보에 대한 잠재적인 추가 위협을 완화하기 위해 단호한 군사·기술적 대응 조처를 할 준비가 돼 있다”며 “우리는 조약 당사국들이 더는 협정 맥락에서 어떠한 의무나 대칭적 선언에도 구속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전 배치 핵탄두 수를 조약이 정한 상한 이상으로 늘릴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뉴스타트는 실전 배치 전략 핵탄두를 1550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핵무기 장착 전략폭격기 등 운반체를 800기로 상호 제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러시아 대통령이 2010년 합의한 뒤 이듬해인 2011년 2월 5일 발효됐다. 애초 2021년 2월 5일 만료될 예정이었으나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5년 연장에 합의했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해 9월 1년 연장을 제안했으나 미국이 답변을 내놓지 않으면서 5일 만료를 앞두고 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사실상 기능을 잃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러시아는 2023년 2월 조약 이행을 중단했고, 미국은 러시아가 협정을 위반했다며 정보 제공을 멈췄다.

외신들은 뉴스타트에 대해 미국과 러시아가 처음으로 체결한 1972년 전략무기제한협정1(SALT1) 이후 명맥을 이어온 마지막 남은 핵군축 조약이라며, 상호 사찰 및 정보 공유를 통해 핵전력의 투명성 제고를 꾀한 것이 특징이었던 만큼 단순히 무기 숫자를 묶어두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8일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뉴스타트가 만료되면 만료되는 것”이라며 조약 유지에 미련이 없다는 뜻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중국을 포함한 새로운 협정 체결을 시사하며 “더 나은 합의를 맺으면 된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뉴스타트 만료 하루 전인 이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전화통화를 가졌다. 이와 관련,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지금 당장 뉴스타트와 관련해 발표할 게 없다”며 “과거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을 포함하지 않고는 21세기에 진정한 군비 통제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분명히 밝혔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AFP)
◇中, 급속도로 핵 증강…“핵개발 경쟁 본격화 전망”

이코노미스트는 1972년 이후 처음으로 양대 핵 강국 간 군축 틀이 붕괴함에 따라, 핵개발 경쟁이 가속하고 핵위협 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중국이 냉전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핵전력을 증강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지난해 1월 기준 러시아(4309기)와 미국(3700기)은 전 세계 핵탄두의 80% 이상을 보유하고 있으며, 중국(600기)이 뒤를 잇고 있다. 중국의 핵탄두 보유량은 2022년과 비교해 71% 급증했다. 시 주석이 2012년 집권했을 당시 240기에 불과했지만, 미 국방부의 최신 추정에 따르면 중국의 핵탄두 보유량은 2030년까지 1000기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대응 방안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다만 미국의 최신 국방전략은 “중국과 러시아가 여러 전장에서 협조 또는 기회를 노려 동시에 행동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미 의회가 2023년 설치한 초당적 국방위원회는 이를 “미국이 준비돼 있지 않은 실존적 도전”으로 평가했다.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억제하기 위해 핵전력 증강에 나설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미국은 이미 신형 지상기반 미사일 ‘센티널’, 콜롬비아급 핵잠수함, 스텔스 폭격기 B-21 개발 등 이른바 ‘핵 삼중체(triad)’ 현대화에 나서고 있다. 다만 예산 초과와 일정 지연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 과학자연맹(FAS) 산하 핵정보프로젝트의 매트 코르다 부국장은 로이터에 “뉴스타트가 사라지면 미국과 러시아는 실전 배치된 미사일과 전략폭격기에 수백 기의 추가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게 된다”며 “가장 공격적인 시나리오에서 현재 배치 전력을 거의 두 배까지 늘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미국·캐나다연구소의 파벨 조로타료프 연구원은 “우크라이나 평화가 실현되지 않는 한 새로운 전략무기감축협정 체결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짚었다.

(사진=AFP)
◇NPT 체제도 ‘흔들’…“예측 불가능한 핵위협 시대 열려”

전문가들은 뉴스타트 만료가 1970년 체결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미칠 악영향을 특히 우려하고 있다. 러시아가 예고한 것처럼 핵무기 보유국이 군축 노력을 포기할 경우, 핵을 보유하지 않은 국가들이 조약을 준수할 명분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은 미국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핵우산 논의를 개시했으며, 한국은 핵잠수함 확보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약 40년간 이어져 온 세계 핵탄두 감축 추세는 이제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예측 가능했던 ‘핵 억제 시대’는 막을 내리고, 예측 불가능하고 다극화된 새로운 핵 위험 시대가 열리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 방위를 외면할 수 있다는 불신이 커지면서, 유럽과 한국 등 일부 동맹국들은 독자 핵무장 구상을 검토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