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AFP)
AI 개발을 둘러싼 빅테크 기업들 간 경쟁이 가열되면서 중국에서 시작된 ‘996’ 근로 문화가 미국 실리콘밸리로 번지고 있다고 BBC방송이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릴라 측은 “우리는 올림픽 선수 같은 사람, 집착과 무한한 야망을 가진 사람, 놀라운 일을 해내면서도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며 “근무 시간은 길지만 딱딱한 구조는 아니다. 아이디어에 몰두하며 새벽 2~3시까지 일하다가 다음 날 정오쯤 출근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996은 오전 9시 출근·밤 9시 퇴근·주 6일 근무를 뜻하는 용어로 장시간 노동을 미덕으로 삼는 근무 행태를 의미한다고 BBC는 부연했다. 방송은 또 일본에선 뇌졸중·심근경색 등 과로로 인한 사망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996은 중국에서조차 과로·초과근로 수당 미지급·노동착취 등에 대한 비판에 휩싸여 2021년 제동이 걸렸던 기업 문화라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이러한 움직임은 최근 몇 년 동안 기술 업계, 특히 AI 분야에서 빠르게 확산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AI 개발 경쟁이 속도전이 되면서 전 세계 모든 관련 기업들이 AI를 어떻게 활용하고 돈을 벌 것인지 밤낮 없이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막대한 자금이 AI 스타트업에 투입된 만큼 창업자들은 ‘누군가 먼저 해내기 전에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유럽·북미에서 IT 인재 채용 회사를 운영하는 에이드리언 키너슬리는 “대부분 AI 스타트업은 벤처캐피털 자금을 받아 경쟁적으로 제품을 시장에 내놓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더 오래 일하면 이긴다’는 논리에 빠져 있다”고 전했다.
인도 인포시스의 창업자인 나라야나 무르티는 중국식 996 문화를 “어느 개인이나 국가도 노력 없이 성장한 적은 없다”며 공개 지지했다.
웹브라우저와 상호작용하는 AI 도구를 개발 중인 스타트업 ‘브라우저-유즈’(Browser-Use) 공동 창업자 마그누스 뮐러도 직장 동료들과 동거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풀려는 문제는 매우 어렵고 경쟁도 치열하다. 문제에 깊이 몰입해야만 ‘갑자기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고 장시간 노동을 당연시했다. 7명뿐인 팀이지만, 그는 “주 40시간을 원하는 사람은 (우리 업무와는) 맞지 않을 것”이라며 “일을 사랑해 중독 수준으로 몰입하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생산성 차이 없어, 똑똑하게 일해야” 반론도
하지만 반론도 적지 않다.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 ‘멘로 벤처스’의 디디 다시 파트너는 젊은 창업자들이 “일한 시간 그 자체를 생산성과 동일시하는 것은 가장 큰 착각”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한 연구는 “주 5일 40시간 수준에서는 생산성을 비교적 잘 유지하지만, 이를 넘어서면 성과가 점진적으로 약화된다”고 분석했다. 미시간주립대 등의 연구에서도 주 70시간 일하는 직원과 주 50시간 일하는 직원의 생산성이 거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원에게 996을 강요하면 가족이 있는 사람이나 숙련된 중장년층 인력을 잃게 되고, 장기적으로 번아웃을 부른다는 게 다시 파트너의 설명이다. 다만 그는 ‘창업자 본인’에 대해서는 “초기 창업자가 주 70~80시간 일하지 않는다면 좋은 투자처가 아닐 것”이라며 직원들과 다른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고 짚었다.
직장 문화 연구자인 타마라 마일스 역시 “허슬(고강도 업무) 문화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며 “요즘 AI 스타트업들은 이를 숨기지 않고 채용 공고에 ‘훈장’처럼 내세운다”고 지적했다. 그는 “구직자가 자발적으로 동의한다 해도 취업난이나 비자 문제 등 권력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남는 경우도 있다”고 꼬집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노동기구(ILO)가 2021년 발표한 공동 연구에 따르면 주 55시간 이상 일하는 장시간 노동은 2016년 기준 전 세계에서 뇌졸중과 허혈성 심장질환으로 인한 사망 74만 5000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주 55시간 이상 일하면 주 35~40시간 일하는 사람에 비해 허혈성 심장질환 사망 위험이 17%, 뇌졸중 위험이 35%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인사관리협회(CIPD)의 벤 윌 정책책임자는 “노동시간을 늘리기보다 관리 역량, 기술·AI 도입을 통해 ‘더 똑똑하게 일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2년 영국에서 61개 기관이 6개월간 임금 삭감 없이 근로시간을 줄이는 실험을 진행한 결과, 스트레스와 질병이 줄고 이직률이 낮아졌지만 생산성은 유지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한편 대형 로펌이나 투자은행(IB) 등 전통적으로 장시간 노동이 관행인 업종에서는 AI 스타트업의 996 논쟁이 낯설지 않다는 반응도 있다. 영국 대형 로펌 변호사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근무가 드물지 않고, IB에서는 주 65~70시간, 대형 거래가 있을 땐 100시간에 육박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