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붐에서 ‘조연’이었던 메모리…왜 갑자기 ‘주연급’ 됐나

해외

이데일리,

2026년 2월 17일, 오전 03:08

[뉴욕=이데일리 김상윤 특파원] 인공지능(AI) 열풍의 최대 수혜주는 그동안 그래픽처리장치(GPU)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였다. 반면 메모리, 특히 D램(DRAM)은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았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메모리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고, 관련 종목이 동반 강세를 보이면서 시장의 시선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AI 시대의 조연’이던 D램이 다시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오고 있다는 평가다.

반도체 전문 분석업체 세미애널리시스(SemiAnalysis)는 최근 공개한 ‘메모리 매니아’(Memory mania) 보고서에서 현재 메모리 시장을 “40년에 한 번 나올 법한 공급 부족”이라고 규정했다. 단순한 업황 반등이 아니라 구조적 타이트(공급 부족) 국면에 들어섰다는 진단이다.

보고서는 특히 최근 가격 급등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점에 근접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지금의 랠리를 고점 신호로 보기에는 이르다는 의미다.

◇예전처럼 안 늘어나는 D램…“기술이 가격을 못 누른다”

과거 D램 산업은 기술 발전이 곧 가격 하락을 의미했다. 공정이 미세해질수록 웨이퍼 한 장에서 생산되는 비트(bit) 수가 급격히 늘었고, 이는 공급 확대와 가격 안정으로 이어졌다.

전성기에는 10년 동안 집적도가 약 100배 가까이 증가했다. 하지만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D램 집적도 증가는 약 2배 수준에 그쳤다. 미세화 속도가 눈에 띄게 둔화된 것이다.

보고서는 “D램 스케일링의 붕괴는 비용, 구조, 산업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더 이상 기술 진보만으로 공급을 빠르게 늘릴 수 없는 국면에 들어섰다는 의미다.

최신 D램 셀은 극도로 얇고 높은 3차원 구조다. 저장되는 전자 수는 수만 개에 불과하다. 공정이 더 미세해질수록 신호는 약해지고, 제조 편차나 온도 변화에도 민감해진다.

이 때문에 과거처럼 공정 전환만으로 공급을 크게 늘리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기술이 가격을 자연스럽게 눌러주는 구조가 약화되면서, 수급에 따른 가격 변동성이 커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늘 반복된 슈퍼사이클…이번에도 그럴까

메모리 산업은 대표적인 경기 순환 산업이다. 보고서는 메모리 업황의 본질이 “수요 변화와 공급 대응 사이의 시차”에 있다고 설명했다.

수요는 빠르게 늘거나 줄어들지만, 최첨단 D램 공장을 짓는 데는 수년이 걸린다. 수십억 달러가 투입되는 구조라 이미 지은 공장을 쉽게 멈출 수도 없다.

1990년대 윈도우 PC 확산, 2010년 스마트폰과 클라우드 성장, 2017~2018년 서버 증설, 코로나19 시기 재택 수요 급증 등 주요 슈퍼사이클은 모두 비슷한 흐름을 보였다.

수요 급증 → 가격 상승 → 공격적 증설 → 과잉공급 → 가격 급락이라는 공식이 반복됐다.

다만 보고서는 이번 사이클이 과거와 단순 비교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코로나19 이후 공급망 충격을 경험한 업체들이 자본지출에 훨씬 신중해졌고, 무리한 증설 대신 수익성 중심 전략을 택하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AI가 만든 ‘단계적 도약’…HBM이 핵심

특히 이번 슈퍼사이클의 핵심 변수는 AI다. 보고서는 새로운 컴퓨팅 플랫폼이 등장하는 시기에는 메모리 수요가 “선형적이지 않고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AI 학습과 추론에 쓰이는 서버는 기존 서버보다 훨씬 많은 메모리를 필요로 한다. 특히 고대역폭 메모리(HBM)는 AI 가속기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으로 자리 잡았다.

과거 PC나 스마트폰은 판매 대수가 늘면서 수요가 증가했다면, AI는 서버 한 대에 탑재되는 메모리 용량 자체가 급격히 커지는 구조다. 수요가 ‘계단식’으로 뛰는 셈이다.

보고서는 이번 슈퍼사이클이 “더 크고 더 길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물리적 미세화 한계와 AI 수요 폭증이 동시에 겹치면서 공급 제약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한 현재 수요·공급 불균형이 “정상화되기보다 오히려 악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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