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은 포기"…대기업 중장년, 창업 시장으로 쏟아진다

해외

이데일리,

2026년 2월 22일, 오후 05:44

[이데일리 성주원 기자] 대기업에서 수십 년을 일한 중장년 전문 인재들이 창업 시장으로 쏟아지고 있다. 격화하는 임원 승진 경쟁에 미련을 버리고, 대기업에서 쌓은 디지털·전문 역량을 무기로 1인 창업에 나서는 것이다.

지난해 10~11월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는 대기업 부장으로 25년을 근무하다 퇴직 후 1인 창업에 나서는 중장년 직장인의 이야기를 담아 “매우 현실적”이라는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드라마 속 김 부장의 이같은 선택은 현실이 되고 있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드라마의 한 장면. (사진=중대재해예방협회)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22일 한국에서 전문 지식을 활용한 1인 창업자 수가 최근 통계 기준 100만명을 돌파하면서 5년 전의 2.5배 수준에 달했다며 이같은 현상에 주목해 보도했다. 우리나라 중소벤처기업부가 2025년 발표한 최신 조사에 따르면, 이 같은 전문 인재 창업 수는 2022년 기준 100만7769개사로 집계됐다.

연령대별로는 50대가 35%로 가장 많고, 40대가 26%로 그 뒤를 이었다. 창업 동기로는 “더 높은 소득을 원한다”는 응답이 40%로 1위였고, “적성과 능력을 발휘하고 싶다”는 응답도 약 30%에 달했다.

◇임원 자리는 줄고, ‘삼말사초’ 바람에 밀려나는 중장년

창업 증가의 핵심 배경은 대기업 내 임원 승진 문턱이 높아졌다는 데 있다. 삼성전자(005930)는 지난 1월 정기 인사에서 93명이 신규 임원으로 승진했지만, 이는 5년 전보다 16% 줄어든 수치다. SK(034730) 관계자는 “수익을 내는 부서만 남기는 도태가 진행되면서 임원 자리 자체가 감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기에 인공지능(AI)·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X) 역량을 갖춘 젊은 인재를 우선 발탁하는 ‘삼말사초(三末四初)’ 트렌드까지 겹쳤다. 30대 후반~40대 초반을 핵심 임원 발탁 대상으로 삼는다는 의미다. 경험 많은 중장년 인재들이 승진 경쟁에서 자연스럽게 밀려나는 구조다.

한국 4대 대기업(삼성·SK·현대차(005380)·LG(003550))의 2024년 매출액은 1037조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40%에 달하지만, 실제 취업자의 약 90%는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대기업 정규직으로 입사하는 것 자체가 극소수에 불과하고, 그 안에서 임원에 오르기란 더욱 좁은 문이다.

지난해 7월 1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서울시 중장년 일자리박람회 2025’에서 구직자들이 채용공고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이데일리 김태형 기자)
◇AI로 출판 공정 자동화…실리콘밸리서 30억 투자 제안도

성공 사례도 나오고 있다. 출판사에서 오래 근무한 송만석(42) 씨는 2022년 창업해 AI 기반 출판 자동화 시스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20만 자 원고를 15초 만에 교열하는 엔진과 도서 홍보용 숏폼 영상을 자동 제작하는 프로그램을 자체 개발했다. 창업 4년 만에 연매출은 약 2억4000만원에 이르렀다. 한국 정부로부터 연간 1억원 이상의 보조금을 지원받고 있으며, 미국 실리콘밸리의 투자사로부터는 본사 미국 이전을 조건으로 약 30억원 규모의 투자 제안도 받은 상태다.

또 다른 사례로 오이택(53) 씨는 4개 대기업 그룹을 거치며 IT 분야에서 28년을 일한 뒤,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수목 진단 기업 ‘수피파이(Soopify)’를 창업했다. 수목의(나무 의사) 자격을 보유한 그는 대기업 시절 익힌 디지털 기술을 접목해 수목 진단부터 약제 처방까지 효율화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업종별로는 전자상거래(이커머스), 온라인 교육, 웹디자인, 3D 프린팅 등 디지털 분야 창업이 두드러지게 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재택근무가 보편화한 것도 디지털 창업 증가의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정부의 저금리 융자 및 보조금 확충도 창업 환경 개선에 기여했다.

◇한국 자영업자 비율 24%… OECD 평균 웃돌아

다만 낙관만 할 수는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한국의 취업자 중 자영업자 비율은 24%로, OECD 회원국 평균(17%)과 일본(10%)을 크게 웃돈다. 한국 대기업의 조기 퇴직 관행으로 50세 전후에 직장을 떠나는 이들이 많고, 재취업이 어렵고 연금도 불충분해 퇴직금을 밑천으로 창업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24년 폐업한 자영업자 수는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섰다. 창업과 폐업이 빠르게 반복되는 가운데서도 생산성은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문지식을 갖춘 인재들의 잇따른 창업이 기술 혁신과 고용 창출로 이어질지, 아니면 과당경쟁 속에 소진될지 주목된다고 전했다.

지난해 8월 1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한 매장에 폐업정리 안내문이 걸려 있다. (사진=이데일리 노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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