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일간 꿈의 크루즈여행…어떻게 '한타바이러스 악몽’ 됐나

해외

이데일리,

2026년 5월 08일, 오후 06:10

[이데일리 임유경 기자] 지난 3월31, 남극의 관문으로 불리는 아르헨티나 휴양도시 우수아이아의 한 식당. 네덜란드국적의 크루즈선 ‘MV 혼디우스호’ 승무원들은 33일간의 긴 항해를 앞두고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선상 셰프는 소셜미디어(SNS) 인스타그램에 이렇게 적었다. “하나의 테이블, 아홉 개 국적, 하나의 장대한 여정.”

그때만 해도 누구도 몰랐다. 이 항해가 몇 주 뒤 국제 보건당국이 추적하는 치명적인 한타바이러스 집단감염 사태로 기록될 것이라는 사실을. 현재까지 크루즈선 탑승자 가운데 3명이 숨지고 최소 5명의 추가 감염자가 발생했다. 감염 공포는 크루즈선을 넘어 이제 스위스, 싱가포르 등 세계 각지로 퍼지고 있다.

한타바이러스 감염 의심 승객들을 태운 크루즈선 MV 혼디우스호가 6일(현지시간) 대서양 섬나라 카보베르데 수도 프라이아를 떠나는 모습.(사진=로이터통신)
7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대서양 오디세이’로 홍보했던 MV 혼디우스 크루즈선 여행이 ‘한타바이러스 악몽’으로 변하게 된 과정을 집중 조명했다. WSJ은 특히 이 크루즈선 프로그램이 자연 탐험을 중심으로 구성됐고 승객들도 물개나 철새를 관찰하려는 자연 애호가 집단이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남극 향한 낭만 항해 시작…바이러스는 이미 선내에

4월 1일, 114명의 승객이 우수아이아에서 혼디우스호에 올랐다. 거대한 빙하 조각이 떠다니는 차가운 해역을 항해하도록 설계된 혼디우스호는 화려한 크루즈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가 유스호텔처럼 2층 침대가 놓인 4인용 객실도 있었다. 이번 항해는 남대서양에서 카보베르데에 이르는 외딴 섬들을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전체 일정은 6주였지만 승객들이 각 기항지에서 자유롭게 승하선할 수 있게 했다.

혼디우스호는 출항 직후 거대한 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알바트로스가 배 주변을 맴돌았고, 돌고래 떼와 바다사자, 혹등고래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이 배에 탑승한 미국 국적 여행 블로거 제이크 로즈마린은 SNS에 적었다. 승객들은 조식과 중식을 뷔페식으로 함께 먹었고, 강연이나 운동 수업에도 단체로 참여했다. 밤이면 모여 목격한 야생동물 이야기를 나눴다.

초반 항해는 순조로웠지만,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바이러스는 조용히 확산하고 있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첫 감염자는 탑승 전 이미 바이러스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다.

◇첫 사망에도 선장 “안전하다”…격리 없이 이어진 공동생활

출항 엿새째인 4월 6일 한타바이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 희생자인 네덜란드 남성은 발병 닷새 만인 11일 선내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12일 혼디우스호 선장은 점심시간 회의에서 승객들을 안심시켰다. 배에 탑승한 튀르키예 국적 유튜버 루히 체네트가 SNS에 올린 영상에 선장은 “우리는 감염 상태가 아니다. 선박은 안전하다”고 말했다.

승객들은 선장의 말을 믿고 계속 함께 식사하고 강연을 듣고 운동을 하고 별을 관찰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승객의 아내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 순간에도 한타바이러스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사진=로이터통신)
이후 바이러스가 크루즈선 밖으로 퍼질 위험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혼디우스호는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섬 가운데 하나인 영국령 트리스탄다쿠냐에 도착했다. 주민은 200여 명뿐. 외부와 연결되는 길은 사실상 배뿐이다.

승객들은 섬 주민들과 펍에서 맥주를 마셨고, 단체 관광을 했다. 승객과 승무원 일부는 학교를 방문해 아이들 앞에서 발표를 하기도 했다. 현지 관리들은 선장과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배에 올랐다. 트리스탄다쿠냐를 떠나기 전 새 승객 6명도 탑승했다.

◇고립된 섬까지 번진 공포…세계 각지로 흩어진 승객들

혼디우스호는 24일 남대서양에 위치한 영국령 세인트헬레나섬에 도착했다. 아직 선내 감염이 한타바이러스로 확인되지 않은 상태로 이곳에서 12개국 출신 승객 29명이 하선했다. 숨진 네덜란드 승객의 시신도 내려졌다. 함께 하선한 아내는 다음 날 남아공 요하네스버그로 이동했다가 현지에서 숨졌다. 이후 5월 2일 독일 국적 여성 한 명이 추가로 혼디우스호 선내에서 사망했다.

WHO에 따르면 혼디우스에서 발생한 한타바이러스 확진자는 5명으로 늘었다. 한타바이러스는 잠복기가 최대 6주에 달하고, 기항지에서 하선한 승객들과 접촉자들까지 포함하면 추가 확산 가능성도 제기된다. 실제 스위스에서는 세인트헬라나에서 하선한 남성이 양성 판정을 받았다. 싱가포르 보건 당국은 같은 섬에서 내린 남성 2명을 격리·검사 중이다.

다만 WHO는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 상황은 아니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한타바이러스는 일반적으로 설치류 배설물 등을 통해 전파되며 사람 간 전염은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사태에서 확인된 바이러스는 사람 간 전파 가능성이 확인된 ‘안데스 바이러스 변종’이다. WHO는 안데스 바이러스도 밀접하고 장시간 접촉을 통해서만 제한적으로 사람 간 전파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아르헨티나 보건 당국은 사망한 네덜란드인 부부가 크루즈 탑승 전 바이러스에 노출됐을 가능성에 주목해 감염 경로를 조사하고 있다. WHO에 따르면 이들은 크루즈에 오르기 전 칠레와 우루과이, 아르헨티나를 돌며 조류 관찰 여행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