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시장 내부는 겉보기와 달리 불안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유가 급등과 전쟁 장기화 우려 속에금융·유통·경기민감주는 일제히 약세를 보이고 미 국채 금리는 급등하는 등 시장 내부 체력은 오히려 약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AI 관련 초대형 기술주 몇 종목이 사실상 시장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상황이다.
뉴욕증권거래소 (사진=AFP)
겉으로 보면 증시는 강세장이 이어지는 모습이지만 내부 분위기는 훨씬 복잡하다. 팩트셋(FactSet) 집계에 따르면 이날 S&P500 편입 종목 가운데 약 3분의 2가 하락 마감했다. 지수는 오르는데 대부분 종목은 떨어진 셈이다. 시장 상승을 사실상 소수의 AI 관련 초대형 기술주가 이끌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 대형 기술주와 반도체주가 지수 상승을 이끌었.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는 2.6% 급등했고 엔비디아는 2.3% 상승했다.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도 4.8% 뛰었다. 반에크 반도체 상장지수펀드(ETF·SMH) 역시 2% 상승했다.
특히 엔비디아·테슬라·애플 최고경영자(CEO)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 경제사절단에 동행한 점이 투자심리를 자극했다. 투자자들은 이를 두고 미국의 대중국 AI칩 규제가 일부 완화될 수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특히 엔비디아의 중국 수출용 AI칩인 H200 관련 규제가 완화될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 반도체주 투자심리를 크게 자극했다.
라이언 데트릭 카슨그룹 수석시장전략가는 “트럼프 대통령은 사실상 작은 군대 규모의 기업인들을 데리고 중국에 갔다”며 “이란 전쟁 악재가 워낙 큰 상황인 만큼 중국 방문에서 의미 있는 경제 성과를 들고 오려는 의도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13일(현지시간) 뉴욕증시에서 AI관련주만 강세를 보이고 있다. (그래픽=Finviz)
월가에서는 최근 증시 랠리가 사실상 AI 투자 열풍 하나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로스 메이필드 베어드 투자전략가는 CNBC와 인터뷰에서 “투자자들은 AI 수요와 성장세를 구조적인 흐름으로 보고 있다”며 “경기순환이나 거시경제 변수들이 반도체 투자 논리를 크게 흔들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란 전쟁에 따른 유가 충격 속에서도 투자자들은 AI 붐은 결국 계속될 것이라고 믿으며 관련 종목으로 피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날 시장은 또 다른 강한 인플레이션 지표를 소화해야 했다. 미 노동부에 따르면 4월 생산자물가지수(PPI)는 전월 대비 1.4% 상승했다. 이는 2022년 3월 이후 가장 큰 월간 상승폭이다. 다우존스가 집계한 시장 예상치(0.5%)를 크게 웃돌았다.
전년 동기 대비 상승률은 6.0%를 기록했다. 이 역시 2022년 12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변동성이 큰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 PPI 역시 전년 대비 5.2% 상승하며 3년여 만에 최고 상승률을 나타냈다.
이번 PPI 충격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시장에서는 이란 전쟁 장기화로 국제유가와 물류비가 급등하면서 생산 단계 물가 압력이 경제 전반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보고서에서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 여파로 원유 공급 차질이 심화되면서 유가 상승 압력이 제조·운송·서비스 분야로 광범위하게 확산하고 있다는 신호가 드러났다.
유가는 단순히 휘발유 가격만 올리는 것이 아니다. 에너지는 제조·항공·운송·유통 등 거의 모든 산업의 핵심 투입 비용이다. 결국 유가가 오르면 기업들의 생산 비용 전반이 상승하게 되고 이는 시간이 지나 소비자 가격으로 전가될 가능성이 커진다.
클라크 벨린 벨웨더웰스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배럴당 100달러 유가의 충격이 생산자 단계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며 “연준은 지금 심각한 인플레이션 문제를 안게 됐다”고 진단했다.
문제는 생산자물가 상승이 아직 소비자 가격에 완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은 기업들이 원가 상승분 일부를 자체적으로 흡수하고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가격 인상 압박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의미다.
크리스 로우 FHN파이낸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아직 기업들이 비용 상승분을 소비자들에게 전면적으로 전가하고 있지는 않다”면서도 “기업들의 원가 부담이 급격히 커지고 있는 만큼 앞으로 가격 인상 압력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웰스파고투자연구소의 게리 슐로스버그는 연준이 선호하는 물가지표인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와 연동되는 일부 항목의 상승폭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시장에서는 아직 기업들이 비용 부담을 완전히 소비자 가격에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30년물 국채금리 추이 (그래픽=CNBC)
하지만 채권시장은 이미 인플레이션 장기화 가능성을 빠르게 반영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 차입 비용의 기준 역할을 하는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장중 4.49%까지 치솟으며 지난해 7월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30년물 국채금리 역시 장중 5.05%를 기록했다.
특히 이날 진행된 250억달러 규모의 30년물 국채 입찰에서는 투자자들이 5% 금리를 제공하는 초장기 국채도 사들였다. 30년물 국채 금리가 5%를 넘어선 것은 2007년 이후 처음이다.
채권 금리는 쉽게 말해 미국 정부가 투자자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이자 비용’이다. 인플레이션이 높아질수록 투자자들은 미래 화폐가치 하락 위험을 보상받기 위해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게 된다. 결국 투자자들이 낮은 금리로는 국채를 사지 않겠다고 나서면 채권 가격은 떨어지고 시장 금리는 상승하게 된다. 중동발 유가 급등으로 인플레이션 우려가 재확산하면서 투자자들이 장기채 투자에 더 높은 금리를 줘야 미국체를 사겠다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이번 주 발표된 소비자물가지수(CPI)와 생산자물가지수(PPI)가 모두 예상치를 웃돌면서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 기대가 다시 약해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오히려 연준이 내년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까지 열어둘 수 있다는 관측도 조금씩 커지는 분위기다.
실제 수전 콜린스 보스턴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이날 “인플레이션 압력이 진정되지 않을 경우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모건스탠리, 1년내 S&P500 8300 간다”
그럼에도 월가 일부에서는 미국 기업들의 실적 회복세와 AI 투자 확대가 증시 상승세를 계속 떠받칠 수 있다는 낙관론도 나온다. 맥스 케트너 HSBC 전략가는 “기업 실적 개선과 여전히 낮은 투자자 포지셔닝을 고려하면 증시는 추가 상승 여력이 있다”며 현재 주식시장 모멘텀이 “매우 강한 강세(max bullish)” 상태라고 평가했다.
모건스탠리의 마이크 윌슨 전략가 역시 미국 증시에 대한 전망을 상향 조정했다. 그는 “지정학적 위험과 AI 충격 속에서도 기업 실적 회복력이 예상보다 강하다”며 향후 12개월 내 S&P500지수가 8300선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물론 AI 랠리가 지나치게 일부 종목에 집중되고 있다는 경고도 계속 나오고 있다. 메이필드는 “현재 반도체와 AI 인프라 관련 종목들은 사실상 시장과 분리돼 움직이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투자자들이 거시경제 환경 악화를 본격적으로 인식하게 되면 차익 실현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전쟁이 빠르게 끝날 것이라는 기대는 이미 상당 부분 무너졌다”며 “지금은 AI 기대감이 시장을 떠받치고 있지만 생산 비용 상승 압력이 계속 커지면 결국 기업 마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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