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속에도 더 커진 역외금융…자산 64조달러, 15년 새 2배

해외

이데일리,

2026년 5월 26일, 오후 02:55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조세회피처로 불리는 역외금융이 각국의 잇단 규제와 단속에도 오히려 몸집을 키우고 있다. 비밀주의로 돈을 숨겨준다는 통념과 달리, 빠르게 성장하는 금융 사업에 오히려 더 잘 맞는 규제 환경을 갖춘 것이 비결로 꼽힌다.

(사진=AFP)
25일(현지시간)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전 세계 기업들의 역외 자산은 2010년부터 2024년까지 세계 국내총생산(GDP)보다 1.5배 빠른 속도로 늘어, 명목 기준 두 배 넘게 불어난 64조달러(약 9경 6000조원)에 이르렀다. 올해 한국 정부 총지출(본예산) 727조 9000억원과 비교하면 132년치에 해당하는 규모다.

기업이 본국 밖에서 빚을 낼 때 발행하는 국제 회사채 가운데 역외에서 찍은 비중도 지난해 말 31%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2010년 저점(24%)에서 꾸준히 높아진 것이다.

2007~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역외금융은 끝났다는 전망이 거듭 나왔다. 미국은 2010년 외국 금융사에 미국인 자산을 보고하도록 한 해외금융계좌신고법(FATCA)을 도입했고, 2016년에는 수십만명의 탈세를 추적한 ‘파나마 페이퍼스’가 폭로돼 각국이 역외 센터에 실소유주 등록과 정보 공유를 압박했다.

그럼에도 역외금융이 번창하게 된 비결은 ‘비밀’이 아니라 ‘규제’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제이슨 샤먼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비밀주의는 사람들이 생각한 것만큼 중요하지 않았다”고 짚었다. 텍사스A&M대의 앤드루 모리스 교수는 “역외 센터들이 작고 민첩한 덕분에 일부 영역에서는 오히려 규제가 더 잘 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재보험과 사모신용펀드, 신흥국 자산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금융 분야를 빨아들이는 자석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곳이 버뮤다다. 미국 생명보험사와 재보험사, 아폴로·KKR 같은 월가 사모자산 운용사가 맞물린 공생 구조가 이곳에서 꽃을 피워 ‘버뮤다 삼각지대’로 불린다. 버뮤다는 사모 자산 투자에 미국보다 적은 자본만 쌓아도 되도록 허용하고, 보험사가 자체 모델로 건전성을 입증하도록 해준다. 미국과 유럽 규제당국마저 버뮤다의 정교한 규제를 인정할 정도다. 이를 발판으로 버뮤다는 전 세계 보험산업 자산의 약 4%, 세계 재보험 자본의 15%에 해당하는 1조 5000억달러(약 2259조원)의 재보험 자산을 끌어모았다.

케이맨제도도 뛰어들었다. 2023년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의 감시 대상 명단에서 빠진 케이맨의 재보험 자산은 2020년 이후 네 배로 불어 1000억달러(약 151조원)를 넘어섰다. 등록된 사모펀드 수도 2020년 1만3000개 미만에서 1만8000개 가까이로 늘었다.

신흥국 자금도 역외금융을 키우는 큰 축이다. 특히 아프리카의 부유층과 기업들이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와 같은 가까운 신흥 금융 중심지에 자산을 맡기고 있다. 컨설팅업체 헨리앤드파트너스에 따르면 UAE는 작년에만 백만장자 9800명을 끌어들여 세계에서 가장 많았다. 다만 이란 전쟁으로 두바이의 매력은 다소 빛이 바랜 상태다.

중국에도 역외 센터는 필수적이다. 중국 기업들은 외국 자본을 끌어오기 위해 케이맨제도에 ‘변동지분실체’(VIE)를 구축해 왔다. 투자자가 미국 증시에 상장된 알리바바 주식을 사거나 틱톡 모회사 바이트댄스 같은 비상장 기업에 투자할 때, 그 돈은 사실상 케이맨의 VIE로 흘러 들어간다. 중국 기업과 기업인들은 엄격한 자본 통제를 피해 해외에서 번 이익을 케이맨제도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를 거쳐 재투자하기도 한다.

물론 순풍만 부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사모신용 시장의 위험 신호를 주시하고 있고, 영국은 지난달 역외 재보험에 대한 자본 요건을 강화하는 방안을 내놨다. 일본은 감독을 강화했고, 중국도 기술 유출을 우려해 VIE 활용을 억제하려 한다. 실제 중국의 유망 인공지능(AI) 기업 문샷AI는 케이맨제도의 VIE를 정리하고 홍콩 증시 상장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역외 센터들은 그간 거듭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 왔다.

이코노미스트는 “세계화의 산물인 역외금융이 오늘날 분열하는 세계에서 오히려 번창한다면 이는 역설적”이라면서도 “놀랄 일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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