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엔화 구매력, 53년 만에 최악…"튀르키예 리라보다 약세"

해외

이데일리,

2026년 5월 26일, 오후 04:47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일본 엔화의 대외 구매력 추락이 멈추지 않고 있다. 엔화의 종합적인 위상(구매력)을 보여주는 지수가 변동환율제로 옮긴 1973년 이후 최저로 떨어지면서, 한때 ‘세계 최약 통화’로 불리던 튀르키예 리라화보다도 못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일본의 구조적인 엔화 매도 압력에 중동발 원유 고공행진이 기름을 붓고 있다는 진단이다.

(사진=AFP)
26일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에 따르면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로빈 브룩스 연구원은 지난 24일 엑스(X·옛 트위터)에 “엔화가 튀르키예 리라화를 밑돌아 세계에서 가장 약한 통화가 됐다”고 적었다. 이후 이 글은 시장에서 큰 화제를 끌어모았다. 그가 근거로 든 것은 여러 통화와 견준 엔화의 종합적인 구매력을 물가 변동과 무역량을 고려해 산출한 실질실효환율이다.

튀르키예는 인플레이션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중앙은행이 완화적 통화정책을 펴면서 통화 신인도가 떨어져 만성적인 통화 약세에 시달려 왔다. 그런 튀르키예 리라화보다 엔화가 더 약해졌다는 것이다. 다만 산출 기준이 제각각인 실효환율의 절댓값을 통화끼리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방향성 차이는 뚜렷하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산출한 실질실효환율(2020년=100)에서 엔화는 1973년 변동환율제 이행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새로 썼다. 반면 튀르키예 리라화는 연초 이후 7% 올랐다.

엔화 구매력이 반등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우선 무역수지가 변수다. 일본의 무역적자는 2022년 연간 20조엔(약 189조원) 규모까지 불었다가 이후 줄어 지난해에는 3조엔에 못 미쳤고, 올해는 2월부터 3개월 연속 월간 흑자를 냈다. 하지만 중동 정세로 원유 가격이 높은 수준에 머물면서 그늘이 드리우고 있다. SMBC닛코증권의 미야마에 고야 선임이코노미스트는 “무역적자가 연 5조엔 정도까지 다시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그렇게 되면 엔화를 끌어내리는 힘이 커진다.

일본 정부의 재정도 엔화에 부담이다. 원유 고공행진은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에게 확장적 재정정책을 부추기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전날 세출 규모가 3조엔(약 28조원)이 넘는 2026회계연도 보정(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하겠다고 밝혔다.

이토추상사 계열 싱크탱크인 이토추총연구소의 다케다 아쓰시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완화적 금융 환경을 유지한 채 적극적 재정정책을 펴는 것은 통화 신인도 저하로 이어진다”며 “금리 상승으로 번지는 등 ‘일본 (자산) 매도’로 연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장에서는 일본은행(BOJ)의 금리 인상이 뒤늦어지는 ‘비하인드 더 커브’(물가 상승 속도를 통화정책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 우려도 가시지 않고 있다.

미국 달러화 대비 환율만 놓고 보면 엔화 약세는 다른 통화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는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이후 약 3개월간 주요 통화의 달러화 대비 등락률을 보면, 에너지를 자체 조달하는 나라나 중동과 지리적으로 거리가 먼 중남미 국가들은 통화 강세가 이어졌다.

반면 인도네시아 루피아화와 한국 원화, 튀르키예 리라화는 4~5% 약세로 부진했다. 엔화는 2%가량 떨어지는 데 그쳐 낙폭이 작아 보인다.

하지만 이는 떠받쳐진 수치라는 분석이 많다. 일본 정부와 BOJ는 지난달 말 이후 총 10조엔(약 95조원) 규모의 엔화 매수 개입을 단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개입이 없었다면 더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는 만큼, 현재 시세는 사실상 당국 개입으로 지탱되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엔화 구매력 하락을 멈추려면 성장 전략을 통한 내수 확대와 잠재성장률 제고가 필수라고 강조했다. 미즈호종합연구소의 히가시후카자와 다케시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기대인플레이션율에 주목했다.

현재 2%를 웃도는 기대인플레율이 자리를 잡게 되면 기업이 임금 인상에 나서기 쉬워지고, 이것이 서비스 물가 상승으로 실물경제에 반영되는 순환에 들어서면서 엔화 구매력이 바닥을 다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그는 “단기적으로 엔화 구매력 회복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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