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루블화 초강세…에너지엔 호재, 수출엔 독

해외

이데일리,

2026년 5월 28일, 오후 02:35

[이데일리 성주원 기자]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3년여만에 최고치로 급등하면서 역설적으로 러시아 전시(戰時) 경제에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에너지 수출 급증이 통화 강세를 이끌었지만, 오히려 곡물·철강·비료 등 주요 수출 산업의 가격 경쟁력을 갉아먹는 구조적 모순이 심화되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2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1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화상 연결을 통해 러시아·벨라루스 핵전력 합동훈련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로이터)
러시아 루블화는 현재 달러당 71루블 수준에서 거래 중이다. 지난해 1월 1일의 달러당 115루블에서 60% 넘게 하락(루블화 가치 상승)했고, 2023년 2월 이후 달러 대비 가장 강한 수준이다. 지난 3월 19일 이후 달러·유로 대비 5분의 1 이상 가치가 절상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산 석유 제재 면제를 연장하고 미국·이스라엘의 대(對)이란 전쟁이 촉발한 글로벌 에너지 위기가 러시아 석유 수출 수입을 불린 결과다.

◇에너지는 웃고, 곡물·철강은 울고

루블화 강세는 에너지 이외 수출 부문을 직격하고 있다. 에너지 수출이 정부 예산 수입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는 러시아 경제 특성상 통화 강세는 “득보다 실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모스크바 증권사 피남의 알렉산더 포타빈 애널리스트는 “러시아는 수출 지향 경제이기 때문에 자국 통화의 큰 폭 강세는 해롭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최대 은행 한 곳의 고위 임원도 루블화 강세가 “사실상 수출업체에 대한 세금”이라고 표현했다.

곡물 시장의 충격은 특히 심각하다. 우크라이나 드니프로 소재 파스트마켓츠 아그리센서스의 마샤 벨리코바 애널리스트는 “현재 환율이 러시아 곡물 거래를 그야말로 죽이고 있다”고 말했다. 철강, 비료 수출업체들도 수익성 확보와 가격 경쟁력 유지 사이에서 압박을 받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이달 산업 콘퍼런스에서 ‘강한 루블화’를 국가 경제의 ‘슬픈 문제’ 중 하나로 꼽으며 우려를 내비쳤다. 러시아 최대 재계 로비 단체의 알렉산더 쇼힌 회장은 러시아 라디오에 출연해 “루블화 강세가 물류·보험·제재 등 기존 제약에 더해 수출을 죽이고 있다”며 기업에 대한 추가 증세 가능성을 경고했다.

이란 전쟁 기간 달러 대비 러시아 루블화 가치 추이. (단위: 달러당 루블, 자료: LSEG·FT)
◇재정 구멍 최대 34조원 전망

루블화 강세는 재정에도 균열을 내고 있다. 올해 1~4월 에너지 수입은 전년 동기 대비 40% 감소했다. 러시아 경제 싱크탱크 CMASF는 루블화가 예산 수입의 중대한 위험이며 연말까지 재정 부족분이 1조6000억~1조7000억 루블(약 34조~36조원)에 달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만 모스크바 증권사 T인베스트먼트의 소피아 도네츠 이코노미스트는 올해 예산이 러시아산 석유 배럴당 59달러를 기준으로 편성된 데다 수출 증가가 루블화 환산 수입 감소를 일부 상쇄하고 있어, 당장 재정 압박은 “감내 가능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약세 유도 위한 시장 개입 가능성은 낮아

루블화 약세 유도를 위한 비정통적 시장 개입 가능성은 낮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전망이다. 현재 러시아 중앙은행 기준금리는 연 14.5%로, 1년 전 21%에서 낮아졌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간 기준 5.6%다.

러시아 외환 거래 베테랑 세르게이 로만추크는 “중앙은행은 변동환율제가 외부 충격에 대한 경제의 조정을 돕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며 “루블화가 진정한 극단적 수준에 도달할 경우에만 정책 기조 변화를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막심 레셰트니코프 러시아 경제부 장관도 지난달 “앞으로 몇년간 루블화는 많은 사람이 원하는 것보다 강세를 유지할 것”이라며 “빠듯한 노동 시장과 함께 주요 도전 과제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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