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발표된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3년여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지만 근원물가는 시장 예상보다 낮게 나왔다. 이에 따라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당장 다음 주 기준금리를 올릴 가능성은 낮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유가 급등에 따른 물가 재상승 우려가 투자심리를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뉴욕증권거래소 (사진=AFP)
◇트럼프 “발전소·교량 공격 지시 순간 가까워져”
시장을 흔든 가장 큰 변수는 중동 정세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폭스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란이 협상 과정에서 미국을 계속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란의 발전소와 교량에 대한 새로운 공습을 지시하는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란은 종전 협정을 체결하고 살아남을 기회를 갖고 있다”면서도 “협상 테이블에서 시간을 끌고 있는 만큼 새로운 공격을 명령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날 오전 트루스소셜에도 “이란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합의를 협상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을 끌었다”며 “이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적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2~3일 안에 합의가 가능하다”며 낙관적인 전망을 내놨지만, 미군 아파치 헬기 격추 사건과 이에 따른 미국의 보복 공습 이후 분위기가 급변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AFP)
최근까지 투자자들은 미국과 이란이 결국 종전 양해각서(MOU)에 합의하고 호르무즈 해협도 정상화될 것으로 기대해 왔다. 하지만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군사 충돌이 재개되면서 시장은 다시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아르젠트 캐피털 매니지먼트의 제드 엘러브룩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투자자들은 결국 합의가 이뤄지고 해협도 다시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유가는 훨씬 더 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
◇호르무즈 재개방 기대 후퇴…유가 다시 90달러선
중동 긴장이 고조되면서 국제유가는 즉각 반응했다. 이날 런던 ICE 선물거래소에서 8월 인도분 브렌트유 선물 종가는 배럴당 93.10달러로 전장 대비 1.80% 올랐다. 뉴욕상업거래소에서 7월 인도분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종가는 배럴당 90.03달러로 전장보다 2.07% 상승했다.
시장은 특히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 기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60일 휴전 연장과 비핵화 협상을 골자로 한 종전 양해각서 체결을 추진해왔지만, 핵 프로그램 포기와 호르무즈 해협 완전 개방 문제를 둘러싼 이견으로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브렛 켄웰 e토로 투자전략가는 “투자자들은 중동에서 빠른 평화 합의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해 왔다”며 “하지만 협상이 지연될수록 유가는 높은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커지고 인플레이션 압력도 강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노스라이트 자산운용의 크리스 자카렐리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중동 상황이 정리되고 해상 운송이 정상화된다면 물가 압력도 완화될 수 있다”면서도 “현재 상황이 지속된다면 기존 전망은 모두 불확실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소비자물가 전월대비 상승률 추이 (그래픽=트레이딩 이코노믹스)
이날 발표된 5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시장에 엇갈린 신호를 줬다. 미 노동부에 따르면 5월 CPI는 전년 동월 대비 4.2% 상승해 2023년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전월 대비 상승률은 0.5%로 시장 예상과 일치했다.
다만 연준이 통화정책 판단 과정에서 중요하게 보는 근원 CPI는 전월 대비 0.2% 상승하는 데 그쳤다. 시장 예상치는 0.3%였다. 전년 동월 대비 상승률은 2.9%로 전망치에 부합했다. 헤드라인 물가는 뜨거웠지만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기저 물가 압력은 예상보다 강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최근 월가에서는 유가 상승이 서비스 물가와 임금 상승으로 확산되면서 광범위한 인플레이션 재가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져 왔다. 그러나 이번 보고서에서는 아직 그런 조짐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자동차 보험료는 전월 대비 1.7% 하락했고 운송서비스 가격과 건강보험료, 신차 가격도 약세를 보였다. 가정용 가구와 생활용품 가격 역시 0.6% 하락했다. 반면 주거비는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임대료는 0.4%, 자가주택 임대료 환산지수(OER)는 0.3% 상승했다.
시장에서는 헤드라인 물가는 높았지만 근원물가가 예상보다 낮게 나오면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CPI 발표 직후 미국 국채금리는 상승폭을 일부 반납했고 달러화도 약세를 보였다. 톰 디 갈로마 미슐러파이낸셜그룹 전무는 “이란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을 고려하면 CPI가 더 강하게 나올 것으로 예상됐었다”며 “채권시장 반응은 상당 부분 숏커버링 성격”이라고 평가했다.
JP모간자산운용은 이번 CPI가 연준에는 불편한 숫자이지만 즉각적인 정책 대응이 필요한 수준은 아니라고 평가했다. 데이비드 켈리 JP모간자산운용 수석 글로벌 전략가는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연준은 이번 물가 지표를 우려스럽지만 정책 대응이 필요한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할 것”이라며 “다음 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사실상 만장일치로 금리를 동결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켈리 전략가는 “연준 입장에서는 분명 편안한 숫자는 아니다”면서도 “이번 사이클에서 5월이 인플레이션의 정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최근 미국 내 휘발유 가격이 5월 20일 고점 대비 약 9% 하락한 점을 근거로 들며 물가 압력이 일부 완화되고 있다고 봤다.
그는 “인플레이션은 여전히 연준 목표치인 2%를 크게 웃돌고 있지만 비용 상승 압력은 점차 약해지고 있다”며 “에너지 가격 흐름을 고려하면 향후 물가 상승세도 둔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전년 대비 CPI가 4%대를 기록한 것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며 현 시점에서 연준이 통화정책을 완화할 명분도 없다”고 덧붙였다.
시장은 다음 주 FOMC에서 금리 변동 가능성을 사실상 배제하고 있다. 다만 미국과 이란 간 전쟁이 국제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을 자극하면서 연말 금리 인상 전망은 크게 강화됐다. 금리 선물시장에서는 연말까지 최소 한 차례 금리 인상 가능성이 거의 100% 수준으로 반영되고 있다. 이는 전쟁 발발 이전 시장이 연말까지 두 차례 이상의 금리 인하를 예상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호르무즈 해협에 면한 아랍에미리트(UAE) 코르파칸 컨테이너 터미널에 유조선들이 정박해 있다.(사진=AFP)
하지만 시장이 안도하지 못한 이유는 에너지 가격 때문이다. 5월 에너지 가격은 전년 동월 대비 23.5% 급등했다. 노동부는 전체 CPI 상승분의 60% 이상이 에너지 가격 상승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휘발유 가격은 전년 대비 40.5% 치솟았다. 전월 대비 상승률도 7.0%에 달했다. 이는 이란 전쟁 이후 원유 공급 차질 우려가 커지면서 국제유가 상승이 미국 소비자물가에 본격 반영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날도 국제유가가 치솟은 게 투심을 흔들었다.
월가에서는 5월 CPI를 유가 충격이 처음 반영된 물가 지표로 보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다. 중동 긴장이 장기화될 경우 에너지 가격 상승이 운송비와 서비스 물가, 식품 가격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비료 공급 차질은 식료품 가격 상승을 유발할 수 있고 운송비 상승은 소비재 전반의 가격 인상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TD증권의 몰리 브룩스 미국 금리전략가는 “시장은 에너지 충격을 발생 여부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로 보고 있다”며 “유가 상승 효과가 향후 물가 지표에 점진적으로 반영될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연준 전망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US뱅크 웰스매니지먼트의 톰 헤인린 투자전략가는 “투자자들은 최근 경제지표를 반영해 더 높은 금리 수준을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다”며 “중동 전쟁이 여름 후반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호손의 스페이스X 시설 외부에 설치된 회사 간판. (사진=AFP)
기술주 약세는 지정학적 불안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마이크론테크놀로지(-4.7%), AMD(-4.9%), 브로드컴(-5.2%) 등 주요 반도체 종목은 최근 5거래일 가운데 4번째 하락세를 기록했다. 반도체 업종 ETF인 SOXX는 이날 3.67% 급락했다. AI 투자 열풍에 힘입어 올해 80% 넘게 상승했던 반도체주에 대한 차익실현 욕구가 커진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AI 투자 열풍을 타고 급등했던 반도체 업종은 올해 들어 80% 넘게 상승했다. 그만큼 밸류에이션 부담도 커진 상태다. 월가에서는 오는 12일 예정된 스페이스X IPO도 기술주 매도세를 부추기고 있다고 보고 있다.
스페이스X는 약 750억달러를 조달하는 사상 최대 규모 IPO를 추진 중이다. 기업가치는 약 1조7500억달러로 평가된다. 기관투자가와 개인투자자들이 스페이스X 공모주 투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존 보유 종목, 특히 수익률이 높았던 AI·반도체 종목을 일부 정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AI 서버 업체 슈퍼마이크로컴퓨터는 이날 70억달러 규모의 주식 및 주식연계증권 발행 계획을 발표한 뒤 무려 28%나 급락했다. 회사 측은 AI 서버 수요 확대에 대응하기 위한 자금 조달이라고 설명했지만 시장은 지분 희석 가능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네이션와이드의 마크 해킷 수석시장전략가는 “역사적인 상승 이후 AI 관련 종목들은 필요한 숨 고르기 국면에 들어갔다”며 “구글과 스페이스X를 시작으로 신규 주식 공급이 늘어나면서 투자자들이 현금을 확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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