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지도부 교체 후 전쟁에 대한 두려움 사라졌다"

해외

이데일리,

2026년 6월 12일, 오후 04:03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이란이 더 이상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11일(현지시간) “한때 무력 사용에 신중하던 이란이 미국·이스라엘과의 ‘저강도 충돌’을 감수하며 위험한 도박에 나섰다”며 이같이 평가했다.

이란 시민들이 지난 4일(현지시간) 수도 테헤란에서 시아파 명절 ‘가디르 이드’를 맞아 최고지도자 모즈타바 하메네이를 지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AFP)
그동안 이란이 무력 사용을 자제해온 데는 전쟁의 뼈아픈 기억이 자리한다. 이란은 1980년 이라크의 침공으로 시작된 8년 전쟁에서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 1988년 끝난 이 전쟁에서 이라크는 화학무기까지 동원했고, 이란에서만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경험을 거쳐 온 이란 지도부, 특히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는 분쟁을 국경 밖으로 밀어내는 데 주력해왔다. 대신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 등과 같은 아랍 민병대를 키워 직접 충돌 없이 중동 전역에 영향력을 투사하는 방식을 택했다.

상황이 급변한 건 올해 2월 28일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개발 저지와 정권 교체를 내걸고 전역에 기습 공습을 감행했고, 이 공습으로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비롯한 이란 수뇌부가 대거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란은 6주간의 전쟁을 버텨냈고, 새롭게 권력을 쥔 현 지도부는 과거와 뚜렷이 다른 기류를 보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현 이란 지도부가 미국과 이스라엘이라는 두 강대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한층 자신감을 얻게 됐다고 분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대내외적으로 ‘인기 없는’ 전쟁을 재개할 뜻이 없다고 보고, 걸프 지역 미군에 대한 주기적 공격을 ‘감내할 수 없는 위험’이 아닌 ‘유용한 지렛대’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자신감은 전략 기조 변화로 이어졌다. 가장 두드러진 곳이 레바논이다. 본래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면 미사일과 특공대로 이스라엘을 타격해 이란을 보호하는 ‘방패’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거꾸로 이란이 헤즈볼라를 보호하려 한다. 자신을 지켜줄 존재였던 대리 세력을, 도리어 자신이 지켜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란은 이런 변화를 ‘억지력’으로 내세운다. 자신이 나서면 이스라엘의 제3국 공격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희망 섞인 생각에 가깝다고 짚었다. 억지란 상대가 ‘득보다 실이 크다’고 판단하게 만들어 행동을 단념시키는 것인데, 최근 벌어진 일은 그 반대였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이란은 이스라엘이 베이루트를 공격하면 보복하겠다고 경고했지만, 이스라엘은 아랑곳 않고 레바논 수도를 폭격했다. 이란이 탄도미사일로 응수하긴 했으나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이란 시민들이 지난 4일(현지시간) 수도 테헤란에서 시아파 명절 ‘가디르 이드’를 맞아 최고지도자 모즈타바 하메네이를 지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AFP)
휴전이 완전히 깨지는 것을 피하려 수위를 조절한 의도적 선택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반격이 더 매서웠다는 평가다. 군사 목표물뿐 아니라 이란 에너지·산업 기반의 핵심인 석유화학 공장까지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억지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억지하려던 상대보다 더 큰 피해를 본 셈이다.

그나마 미국을 상대로는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고 걸프 국가들에 수천발의 미사일·드론을 쏘아붙여 지난 4월 휴전을 끌어냈다. 이후로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추가로 양보하도록 결의는 보이되, 그가 외교 자체를 포기할 만큼 밀어붙이지는 않고 있다.

이 줄타기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상황인지는 최근 며칠 새 그대로 드러났다. 지난 9일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 상공에서 미군 아파치 헬기를 격추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방공망 폭격으로 맞받아쳤고, 이란은 다시 바레인과 쿠웨이트의 미군 기지를 공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튿날 소셜미디어에 이란이 “협상에 너무 오래 끌었다.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분노를 쏟아냈고, 같은 날 밤 추가 타격을 지시했다.

위태로운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국면이다. 이란은 교착 상태가 미국에도 비용을 치르게 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하지만, 헬기 한 대를 잃은 것만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태도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반대로 만약 조종사가 사망했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전면전 재개로 떠밀렸을 수도 있다. 한 끗 차이로 위기를 비켜선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AFP)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이란과 ‘훌륭한 합의’에 도달했다고 재차 주장했다. 이란 외무부는 양해각서 대부분이 최종 조율됐다면서도, 미국의 ‘과도한’ 요구가 여전히 걸림돌이라고 밝혔다. 두 달 넘게 휴전이 대체로 유지되고 있으나 협상은 교착 상태이고, 합의 위반 사례도 잦아지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란이 새로 얻은 자신감에도 그 역량은 제한적이라고 진단했다. 호르무즈는 이미 봉쇄됐고, 트럼프 대통령은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지 않는 한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여서다.

이란은 휴전을 깨지 않고는 걸프 이웃국 공격을 재개할 수 없고,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쏘는 것도 억지 효과가 약하다. 결국 남은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자신감처럼 보이는 것이 절박함으로 비칠 수도 있다”며 “이란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더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잃을 게 적어졌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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