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시대의 승자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가 반도체를 넘어 전력망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진단이 월가에서 나왔다. AI 모델은 빠르게 진화하고 데이터센터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발전소와 송전망은 물리적·제도적 한계 때문에 같은 속도로 확장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AI와 제조업 리쇼어링(생산기지 국내 이전)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미국 경제의 새로운 병목으로 전력 문제가 부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모건스탠리는 1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본사에서 'AI 인프라 전력 공급의 미래(The Future of Powering AI Infrastructure)' 포럼을 열고 있다. 왼쪽부터 짐 캐런(Jim Caron) 모건스탠리 투자운용 포트폴리오솔루션그룹 최고투자책임자(CIO), 톰 그린버그(Tom Greenburg) 모건스탠리 투자은행 부회장, 크리스 오르테가(Chris Ortega) 모건스탠리 인프라 파트너스 미주 대표, 조나선 프래걸(Jonathan Pragel) 칼버트 리서치 앤드 매니지먼트 전력·유틸리티 애널리스트, 르나토 그랜몽(Renato Grandmont) 모건스탠리 글로벌투자위원회(GIO) 매니징디렉터. (사진=김상윤 특파원)
크리스 오르테가(Chris Ortega) 모건스탠리 인프라 파트너스 미주 대표는 “오늘의 AI가 앞으로 가장 형편없는 AI가 될 것(Today is as bad as AI will ever be)”이라며 AI 발전이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지난 20년 넘게 전력 수요 증가가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역사적인 변곡점에 들어섰다”며 “문제는 증가 규모가 아니라 증가 속도”라고 강조했다. AI가 요구하는 전력 수요 증가 속도가 발전소와 송전망 건설 속도를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르나토 그랜몽(Renato Grandmont) 모건스탠리 글로벌투자위원회(GIO) 매니징디렉터 역시 시장과 정책당국이 가장 과소평가하고 있는 변수로 “전력 수요 증가의 속도”를 꼽았다. 그는 전력 생산과 송전망, 자금 조달, 인허가, 지역사회의 수용성 문제가 모두 이 속도와 연결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랜몽 매니징디렉터는 “AI 경쟁의 승패는 더 뛰어난 모델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그 모델을 돌릴 전력을 얼마나 빨리 확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AI 시대의 병목이 반도체에서 전력망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실제 AI 인프라 투자 규모는 기존 산업의 상식을 뛰어넘고 있다. 오르테가 대표는 올해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 메타 등 주요 하이퍼스케일러들의 설비투자 규모가 약 70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전 세계 통신업계 투자 규모인 3000억달러의 두 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현재 미국 전체 전력 소비에서 데이터센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4%지만 향후 2년 안에 두 배 수준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됐다.
그랜몽 매니징디렉터는 미국 경제의 구조적 성장 동력으로 △리쇼어링을 촉진하는 재정정책 △AI 투자 확대 △에너지 안보와 전력 인프라 구축 △자본시장 확대를 꼽았다. 그는 향후 10년 동안 미국 전력 수요가 최대 50% 증가할 수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막대한 전력 인프라 투자가 필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톰 그린버그(Tom Greenburg) 모건스탠리 투자은행 부회장
모건스탠리가 가장 우려한 것은 이른바 ‘미싱 메가와트(Missing Megawatts)’ 문제다. AI가 요구하는 전력 수요를 발전소와 송전망, 인허가 체계가 따라가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톰 그린버그(Tom Greenburg) 모건스탠리 투자은행 부회장은 “전력에 접근할 수 없다면 AI 모델도 훈련할 수 없다(If you can‘t have access to power, you can’t train the model)”며 “AI 산업의 핵심 병목이 전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미국 전력 시스템이 수십년 동안 낮은 전력 수요 증가를 전제로 설계됐다고 설명했다. 반면 AI 기업들은 2~3년 안에 전력을 공급받기를 원하지만 발전소 건설과 송전망 확충, 인허가 절차는 여전히 10년 단위로 움직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세계 최대 데이터센터 밀집 지역인 버지니아 북부가 속한 PJM 전력망은 5년 전만 해도 20%를 웃도는 예비전력률을 유지했지만 현재는 전력 수급 여유가 크게 줄어든 상태다. 오르테가 대표는 “오늘날 우리는 명백히 전력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빅테크 기업들은 기존 전력망 연결을 기다리는 대신 데이터센터 인근에 자체 발전설비를 구축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그린버그 부회장은 이를 두고 “전력망을 우회한다(Bypass the grid)”고 표현했다. 데이터센터 옆에 발전설비를 직접 구축하는 이른바 ‘비하인드 더 미터(Behind-the-Meter)’ 방식이다.
조나선 프래걸(Jonathan Pragel) 칼버트 리서치 앤드 매니지먼트 전력·유틸리티 애널리스트는 미국 최대 전력시장인 PJM에서 최근 전력 가격이 전년 대비 약 75% 상승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AI 수요 증가가 이미 전력시장 가격을 끌어올리고 있으며 향후 전기요금 문제가 정치권의 핵심 이슈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조나선 프래걸(Jonathan Pragel) 칼버트 리서치 앤드 매니지먼트 전력·유틸리티 애널리스트
전력 부족이 AI 기업 가치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그린버그 부회장은 하이퍼스케일러들이 이미 전력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으며 가스발전과 원전, 지열발전 등 다양한 전력원에 투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전력 문제가 AI 투자 열기를 꺾는 요인이기보다 AI 기업들이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데이터센터 입지도 변화하고 있다. 그린버그 부회장은 북버지니아가 여전히 가장 중요한 데이터센터 허브지만 전력과 토지, 냉각시설 확보가 가능한 지역으로 관심이 확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텍사스와 와이오밍, 캐나다 등이 대표적인 지역으로 꼽혔다.
오르테가 대표는 애틀랜타와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등이 새로운 데이터센터 허브로 부상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AI 산업이 초거대 모델을 학습시키는 ‘트레이닝(training)’ 단계에서 실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추론(inference)’ 단계로 이동하면서 데이터센터 입지도 변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초대형 데이터센터에 집중됐던 컴퓨팅 수요가 점차 분산되면서 애틀랜타와 댈러스-포트워스, 콜럼버스 등 전력 접근성과 지리적 분산성이 뛰어난 지역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랜몽 매니징디렉터는 전력 부족 문제가 AI 산업의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 “혁신은 결국 병목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며 “5~10년 안에 에너지 사용량이 훨씬 적은 양자컴퓨팅이 상용화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크리스 오르테가(Chris Ortega) 모건스탠리 인프라 파트너스 미주 대표
AI 경쟁이 결국 에너지와 공급망을 둘러싼 지정학 경쟁으로 확산되고 있다. 프래걸 애널리스트는 “중국은 녹색경제의 OPEC(China is the OPEC of the green economy)”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OPEC의 시장 점유율은 30% 수준이지만 중국은 분야에 따라 70%, 80%, 90%에 달한다”고 말했다.
실제 중국은 태양광 패널 핵심 부품인 태양광 웨이퍼 생산의 97%를 차지하고 있다. 프래걸 애널리스트는 “97%의 생산 능력이 한 나라에 집중되는 것은 상당한 위험”이라며 미국과 동맹국들이 공급망 다변화에 나서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모건스탠리는 향후 AI 경쟁 구도를 사실상 미국과 중국의 양강 체제로 규정했다. 오르테가 대표는 “우리는 양극 체제(bipolar situation)로 이동하고 있다”며 미국은 기술 혁신과 기업가 정신, 자본시장, 에너지 경쟁력을 갖고 있고 중국은 중앙집권적 의사결정과 공급망 장악력을 강점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반면 유럽은 복잡한 규제와 전력 인프라 문제 등으로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의 경쟁력으로는 값싼 에너지와 깊은 자본시장이 꼽혔다. 그랜몽 매니징디렉터는 미국의 핵심 경쟁력으로 △깊고 유동적인 자본시장 △AI 기술 우위 △값싼 에너지 △전력망 인프라 △인재 확보 능력을 제시했다. 그는 미국이 러시아를 대체해 유럽의 주요 천연가스 공급국으로 부상했다며 “유럽은 과거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의존했지만 이제는 미국산 LNG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르나토 그랜몽(Renato Grandmont) 모건스탠리 글로벌투자위원회(GIO) 매니징디렉터
그랜몽 매니징디렉터는 “최근 미국과 한국 간 산업 협력이 조선업과 AI 인프라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미국의 에너지 수출 확대와 전력 인프라 투자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린버그 부회장은 “AI 시대에는 안정적인 기저전원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며 원전 산업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 기업들이 원전 기술과 공급망 분야에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며 미국의 전력 인프라 확대 과정에서 협력 기회가 늘어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랜몽 매니징디렉터는 “미국의 에너지 인프라 투자 확대는 단순히 발전소 건설에 그치지 않는다”며 “송전망과 전력설비, 데이터센터, 냉각 시스템 등 광범위한 공급망 투자가 수반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런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춘 한국 기업들에도 상당한 기회가 열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