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일환 기자]
전문가들이 가장 먼저 지목한 변화는 미국 패권의 한계다. 외교부 2차관을 지낸 이태호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이란 사태를 두고 “경제적 상호의존의 무기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황이다”고 평가했다. 그는 “군사력으로 보면 이란이 미국과 비교 대상이 되지 않지만 호르무즈 해협이라는 초크포인트(choke point)를 쥐면서 비대칭적 전략을 찾아냈다”며 “급소를 장악하는 것 자체가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존 햄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명예회장은 현재를 ‘다극화 시대’로 규정했다. 그는 “일극 체제는 이미 15년 전에 끝났고 우리는 다극 체제의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고 진단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약화했고 중국 역시 부동산 침체와 내수 부진, 인구 감소라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세계질서 재편이 가속하는 가운데 한반도 의제 역시 국제사회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태호 전 차관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중국·러시아·미국·일본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정작 한반도 자체는 후순위로 밀려나고 있는 느낌이다”며 “비핵화 문제가 부수적인 관심사로 가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북·중·러 연대가 공고화하면서 국제사회가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관리해야 할 현실’로 받아들이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외교부 1차관을 지낸 임성남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역시 기존 접근법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상황은 점점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은데 계속 똑같은 해법에 의존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지 고민해야 한다”며 ‘전략적 창의성’을 주문했다.
◇“경제와 안보가 분리되는 시대는 끝났다”
전문가들은 결국 한국이 ‘한반도 안보’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미국 전략자문사 더아시아그룹(TAG)의 렉슨 류 사장은 “한국은 세계질서 변화에 휘둘리는 국가가 아니라 답을 제시하는 국가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안보는 단순히 군사력의 문제가 아니라 혁신 역량과 생산 능력, 위기 상황에서 함께 대응할 수 있는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능력이 핵심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노리나 허츠 런던대 세계번영연구소 명예교수는 “자유무역과 자유시장이 세계의 기본 원칙이었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진단했다. 박기순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교수도 “경제와 안보가 분리되는 시대는 끝났고 공급망 자체가 안보가 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미·중 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분쟁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에서 한국 역시 안보와 경제, 공급망, 기술 경쟁을 통합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제언했다. 기존의 한미동맹 중심 전략에 더해 일본·호주·유럽·글로벌 사우스 국가와의 다층적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경제안보 역량을 키우는 것이 새로운 생존법이라는 것이다. 결국 ‘한반도 안보’라는 기존 틀을 넘어 한국의 생존 전략 자체를 한반도 밖에서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제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