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실패·치안 불안·트럼프 압박…중남미, 우향우로 방향 튼 이유 '셋'

해외

이데일리,

2026년 6월 23일, 오후 07:09

[이데일리 김윤지 기자] “(좌파)대통령의 오장육부를 도려내겠다.” “범죄자들을 쥐와 바퀴벌레처럼 죽이겠다.”

콜롬비아 대선 결선투표에서 극단적인 수사를 쏟아내던 강경 우파 후보가 사실상 승리하면서 중남미 정치 지형이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 십여 년간 대륙을 휩쓸었던 좌파 성향의 ‘핑크 타이드(Pink Tide)’가 물러나고 우파 정권이 연이어 집권하는 이른바 ‘블루 타이드(Blue Tide)’ 현상이 확산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와 에콰도르에 이어 최근 칠레, 콜롬비아, 페루 대선에서도 보수·우파 진영이 잇따라 승기를 잡으며 중남미 정치 성향이 ‘우향우’로 정점에 달하는 모양새다. 이러한 현상은 좌파 정권의 경제 실패, 치안 악화라는 내부적 요인과 함께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강력한 외교적 압박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22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을 통해 전날 치러진 콜롬비아 대선 결선투표에서 승리한 우파 성향의 아벨라르도 데 라 에스프리에야 ‘조국의 수호자들’ 후보에게 축하의 뜻을 전하며 “미국과 콜롬비아가 강력한 관계를 구축하고 협력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달 7일 치러진 페루 대통령 결선투표에서도 보수 성향의 게이코 후지모리 후보가 약 0.2%포인트 차이로 승리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이 4번째 대선 도전인 후지모리 후보는 우파 정치인으로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딸이다. 그는 강력한 치안 정책과 미국, 아르헨티나, 칠레, 에콰도르의 보수 지도자들과의 우파 연대를 내걸고 있다.

콜롬비아와 페루가 우경화 흐름에 합류하면서 중남미 정치 지형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평가다. 칠레, 아르헨티나, 코스타리카, 에콰도르 등 최근 중남미에선 우파 성향 지도자들이 등장했다. 볼리비아도 지난해 중도 우파 로드리고 파스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20년에 걸친 좌파 집권을 끝냈다. 이는 2020년대 초 콜롬비아 최초의 좌파 대통령인 구스타보 페트로를 포함해 여러 좌파 정부를 집권시켰던 이른바 ‘핑크 타이드’(pink tide·좌파 물결)의 퇴조를 보여준다.

블루 타이드의 가장 큰 내부 동력은 기존 좌파 정부의 정책 실패에 대한 유권자들의 냉정한 심판이다. 과거 좌파 정권들은 원자재 호황기에 막대한 재정을 지출하며 선심성 복지 정책을 펼쳤으나 호황이 끝난 뒤 심각한 재정 적자와 초인플레이션이라는 고질적인 경제난을 남겼다. 이에 지친 유권자들이 규제 완화와 법인세 인하, 공공예산 감축 등을 내세운 우파 후보들의 시장 경제 중심 공약에 표를 던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통제 불능 수준으로 악화한 치안 문제도 결정타였다. 마약 카르텔 범죄와 강력 범죄가 급증하면서 사회적 불안감이 극에 달하자, 유권자들은 강력한 군·경 동원과 범죄 소탕을 예고한 우파 진영의 ‘철권통치’ 공약에 빠르게 결집했다.

특히 중남미에서 치안 문제는 우경화의 가장 강력한 동력으로 꼽힌다. 마약 조직 및 갱단 범죄 등 각종 범죄가 확산하면서 유권자들은 장기적인 제도 개혁보다 즉각적인 단속과 처벌을 약속하는 후보들에게 반응하고 있다. 엘살바도르의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이 강경한 갱단 소탕 정책으로 높은 지지를 얻은 것도 역내 우파 후보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콜롬비아의 아벨라도 에스프리에야 ‘조국의 수호자들’ 후보(사진=AFP)
외부적으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강력한 압박과 ‘선택적 지원’ 전략이 블루 타이드 확산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으로 향하는 불법 이민 차단과 중남미 내 중국의 영향력 견제를 위해 역내 국가들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베네수엘라와 쿠바 등 강성 좌파 정권에는 고강도 경제 제재를 가해 고립시켰고 이는 주변국 유권자들에게 좌파 집권에 대한 강한 경각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반면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등 친미 우파 정부에는 차관 지원, 무역 혜택, 백악관 초청 등 파격적인 ‘당근’을 제공하며 이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 데 일조했다. 특히 이민자 경로에 있는 국가를 상대로 “국경을 통제하지 않으면 관세 폭탄을 매기겠다”는 미국의 전방위적 압박은 중남미 국가들이 공권력을 강화하는 명분이 됐고 결과적으로 보수 세력에게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적인 지지자인 에스프리에야는 이 같은 우파 물결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변호사 출신인 그는 공직 경험이 없지만 스스로 ‘엘 티그레’(El Tigre·호랑이)라고 부르며 작은 정부와 감세, ‘부켈레식’ 강경한 치안 공약을 앞세웠다. 그는 마약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초대형 교도소를 짓고 주요 범죄조직 수장을 체포하거나 사살하겠다고 했다. 하버드대 중남미학 및 정부학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는 “트럼프에게는 보기 드물 정도로 유리한 정치적 구도가 형성됐다”며 “지금처럼 많은 정부가 이념적으로 한 방향에 수렴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다.

중남미에서 우파 정부가 부상했지만 아직 그들의 정책이 구체적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우파 지도자들은 감세와 작은 정부를 약속하며 지지를 얻었지만 현재 재정적자와 긴축 반발이라는 현실적 제약에 직면해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긴축 조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고 칠레에서도 에너지 가격 상승이 정부 지지율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대륙의 양대 경제 축인 브라질(룰라 정부)과 멕시코(셰인바움 정부)는 여전히 좌파 정부가 굳건히 버티고 있어 당분간 우파 정권 중심의 블루 타이드 세력과 기존 좌파 블록 간의 치열한 주도권 싸움 양상으로 흘러갈 전망이다. 특히 올해 10월 브라질 대선 결과가 남미 대륙의 최종 정치 지형을 결정할 최대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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