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터크먼 뉴욕증권거래소(NYSE) 트레이더가 NYSE 트레이딩 플로어에서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AFP)
반도체 주 중심으로 랠리를 보였던 한국 증시가 급락하면서 미 증시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올해 AI 투자 열풍의 최대 수혜 시장 중 하나였던 코스피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대규모 매도세에 휘청였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외국인들은 하루 동안 약 25억달러 규모의 코스피 주식을 순매도했고, 이에 따라 코스피는 사상 최고치 대비 10% 가까운 하락폭을 기록했다. 특히 AI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대표 수혜주인 SK하이닉스가 12% 넘게 폭락하면서 투자심리가 급격히 냉각됐다.
시장 참가자들은 이번 하락의 배경으로 과도한 레버리지와 AI 관련 종목으로의 쏠림 현상을 지목하고 있다. 한국 개인투자자들의 신용거래 포지션 청산이 촉발된 데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추종하는 레버리지 ETF에서 대규모 환매가 발생하면서 매도 압력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분석이다. 한국 시장에서 시작된 투매는 곧바로 일본과 유럽, 미국 증시로 번졌다.
일본 닛케이225지수는 3.55% 하락하며 8거래일 연속 상승세를 마감했고, 범유럽 스톡스600 지수도 1% 넘게 밀렸다. 특히 기술업종 지수는 3% 가까이 하락하며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I와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 유럽 반도체주들도 6% 이상 급락하기도 했다.
미국 시장에서도 반도체주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10% 급락했고, 샌디스크는 12%, 씨게이트테크놀로지는 7% 이상 하락 중이다. AMD는 5%, 퀄컴은 9%, 인텔은 3% 각각 떨어지기도 했다. 반도체 업종을 추종하는 반에크 반도체 ETF(SMH)는 7% 가까이 급락했고, 기술주 ETF인 XLK 역시 3% 넘게 밀렸다. 올해 AI 투자 수혜 기대 속에 폭등했던 종목들에 대한 차익실현이 한꺼번에 쏟아진 셈이다.
월가에서는 이번 조정이 AI 열풍 자체에 대한 의구심을 반영한다고 보고 있다. 그동안 엔비디아를 비롯한 반도체 기업들과 빅테크 기업들은 AI 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해 수천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집행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투자자들은 이러한 막대한 지출이 실제 수익 증가로 이어질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크리스 로우 FHN파이낸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현재 시장의 위험회피 움직임은 AI 낙관론이 지나쳤을 수 있다는 우려를 반영한다”며 “투자자들이 AI 관련 자산에 대한 기대치를 재조정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모든 기술주가 약세를 보인 것은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아마존 등 일부 대형 기술주는 상대적으로 선방했고, 월마트와 프록터앤드갬블(P&G), 존슨앤드존슨(J&J) 등 경기방어주에는 자금이 유입됐다. IBM은 JP모건의 투자등급 상향 조정에 힘입어 4% 넘게 상승했다. 투자자들이 성장주에서 방어주로 이동하는 전형적인 위험회피 장세가 나타난 것이다.
안전자산 선호도 뚜렷해졌다. 미국 국채 가격은 상승했고, 엔화와 스위스 프랑 등 대표적인 안전통화도 강세를 나타냈다. 반면 비트코인은 3%가량 하락했다. 국제유가는 오히려 하락세를 보였다. 미국과 이란의 평화협정 이후 호르무즈 해협 통항이 정상화되면서 원유 공급 차질 우려가 완화됐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긴장이 완화되면서 유가는 내려가고 기술주만 조정을 받는 독특한 시장 환경이 형성되고 있다.
월가에서는 아직 이번 하락을 AI 버블 붕괴의 신호로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나온다. 맷 말리 밀러타박 수석 시장전략가는 “미국 증시에 대한 심각한 경고 신호가 나오려면 현재보다 훨씬 큰 하락이 필요하다”며 “다만 한국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의 높은 레버리지 수준은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줄리언 에마누엘 에버코어ISI 수석 전략가 역시 “최근 기술주 조정은 과열 해소 과정에 가깝다”며 “결국 시장은 다시 기업 실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투자자들의 시선은 이제 24일 장 마감 후 발표되는 마이크론의 실적으로 향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가 실제 메모리 반도체 수요 증가로 이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최근의 AI 투자 열풍이 기업 실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최근 수개월 동안 시장을 끌어올린 것은 AI에 대한 기대였지만, 앞으로 시장을 움직일 것은 그 기대를 뒷받침할 실적이라는 점에서 마이크론의 실적 발표가 이번 조정의 향방을 결정할 핵심 변수로 꼽히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