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케네디센터에서 열린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본선 조 추첨 행사에서 추첨 결과를 지켜본 뒤 반응하고 있다. (사진=AFP)
논란은 미국 대표팀 핵심 공격수인 발로건의 퇴장에서 시작됐다. 발로건은 월드컵 경기에서 레드카드를 받아 자동으로 다음 경기인 벨기에전에 출전할 수 없게 됐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주 FIFA 회장 잔니 인판티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징계를 재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FIFA는 6일 발로건의 1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취소했고, 그는 벨기에전에 정상적으로 출전할 수 있게 됐다. 경기 중 퇴장으로 인한 자동 출전 정지를 FIFA가 번복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벨기에는 즉각 반발했다. 막심 프레보 벨기에 외무장관은 성명을 통해 “이번 결정은 많은 의문을 남긴다”며 “만약 전화 한 통이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설명하는 이유라면 이는 축구와 스포츠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벨기에축구협회(RBFA)도 “발로건의 출전 자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며 절차 전반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유럽축구연맹(UEFA)의 반응은 더욱 강경했다. UEFA는 FIFA의 징계 번복을 “선을 넘은 결정”이라고 규정하면서 “전례가 없고 이해할 수도, 정당화할 수도 없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FIFA 항소위원회는 벨기에축구협회가 해당 절차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항소를 각하했다. 벨기에는 추가 항소 권한을 얻었지만 경기 시작 전까지 최종 판단이 내려질지는 불투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인판티노 회장에게 전화를 건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직접적인 개입 의혹은 부인했다. 그는 “나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경기를 봤는데 그것은 파울도, 위반 행위도 아니었다”며 “재검토를 요청했을 뿐 무엇을 하라고 지시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최종 결정은 위원회가 내렸고 올바른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다”며 “팬들은 최고의 선수들이 뛰는 경기를 보고 싶어 한다”고 주장했다.
인판티노 회장도 성명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과 월드컵 관련 현안을 정기적으로 논의하고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통화 당시 FIFA의 독립적인 사법기구가 사건을 심리 중이며 적법한 절차에 따라 판단이 내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것이 FIFA 시스템이며 내가 항상 지켜온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빌 화이트 주벨기에 미국대사도 엑스(X)에 “트럼프 대통령은 FIFA의 내부 운영에 간섭하지 않는다”며 논란 진화에 나섰다.
이번 논란은 최근 대서양 동맹을 둘러싼 갈등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여진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들어 나토 회원국 덴마크의 자치령인 그린란드 편입을 주장했고, 유럽을 상대로 고율 관세를 압박하는 한편 국방비 증액을 거듭 요구해 왔다. 이란 문제를 놓고는 유럽이 미국을 충분히 지원하지 않는다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드러냈고, 유럽 주둔 미군 감축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동맹국들을 압박했다.
그럼에도 유럽은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고 있는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미국과의 공조를 유지해야 하는 처지다. 최근 러시아의 공습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민간인 사망자가 잇따르는 상황에서 미국의 군사 지원은 여전히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유럽 정상들은 이번 나토 정상회의에서 국방비 확대 계획을 제시하며 트럼프 행정부의 안보 공약을 유지하는 데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이번 축구 논란이 당장 미국과 유럽 관계를 결정적으로 흔들 정도는 아니지만, 트럼프 행정부를 바라보는 유럽의 인식을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무즈타바 라흐만 유라시아그룹 유럽 담당 매니징디렉터는 “이번 사건은 트럼프 대통령이 규범이나 관행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안을 ‘미국 우선주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점을 유럽 정부에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벨기에 싱크탱크 브뤼헐의 제이컵 펑크 키르케고르 연구원도 “유럽에서는 이번 사안을 ‘트럼프 아래의 미국은 법과 규범의 제약을 받지 않는 나라’라는 또 하나의 사례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그는 “우크라이나가 미국산 패트리엇 방공 시스템 지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만큼 유럽 정상들이 나토 정상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벨기에 총리실은 이번 논란을 우회적으로 풍자했다. 바르트 더베버 총리에 대한 논평 요청에 총리의 반려묘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대신 소개했고, 게시물에는 “레드카드? 그래도 난 뛸 거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외교와 안보를 둘러싼 갈등이 월드컵 축구장으로까지 번진 현재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