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아세안 흔들기'…남중국해서 충돌한 필리핀 노골적 패싱

해외

이데일리,

2026년 7월 23일, 오후 05:03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중국이 남중국해를 둘러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의 결속 흔들기에 나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왕이 중국 공산당 정치국원 겸 외교부장이 영유권 분쟁 상대인 필리핀이 주도하는 회의는 건너뛰고, 나머지 회원국에는 협력 확대를 제안하면서다.

화춘잉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23일 필리핀 메트로마닐라 파사이에서 열린 제27차 아세안+3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왕이 중국 공산당 정치국원 겸 외교부장을 대신해 나왔다. (사진=AFP)
화춘잉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23일 필리핀 메트로마닐라 파사이에서 열린 제27차 아세안+3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왕이 중국 공산당 정치국원 겸 외교부장을 대신해 나왔다. (사진=AFP)
◇필리핀 주도 회의만 콕 집어 불참

23일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에 따르면 왕 부장은 이날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과 한중일 3국의 아세안+3 외교장관 회의에 불참했다. 중국 외교부의 화춘잉 부부장이 대리로 참석해 “중국은 인접국과의 우호적 관계 발전을 중시하며 동아시아 협력을 추진한다”고 말했다. 자리는 비웠지만 아세안과의 협력 의지는 남겨둔 셈이다.

같은 날 예정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각료회의와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외교장관 회의에도 왕 부장은 나가지 않았다. 각국이 외교장관급을 내보낸 자리였다. 반면 전날 열린 중국과 아세안의 외교장관 회의에는 왕 부장도 참석했다. 그는 양측의 ‘운명공동체’ 구축을 위해 자유무역과 에너지 안보, 공급망 안정을 둘러싼 협력을 넓히자고 제안했다.

이날 왕 부장의 회의 불참은 의장국인 필리핀에서 비판의 표적이 되는 상황을 피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테레사 라자로 필리핀 외교장관은 ARF 각료회의 첫머리에 해양 안보를 주요 의제로 삼겠다고 못 박았다. 왕 부장이 자리를 지켰다면 미국과 일본 등으로부터 직접 비판을 받을 수 있었다. 미국에선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이 참석했다.

해양 안보가 의제로 떠오른 것은 최근 충돌 때문이다. 필리핀은 지난 20일 남중국해 아융인 암초(영어명 세컨드토머스 암초) 주변에서 자국 해군 병사가 중국 해경국 대원에게 구타당했다고 공개했다. 중국은 필리핀 측이 먼저 공격했다고 반박했고, 이튿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이 중국 대사를 불러 항의하자 중국도 필리핀 대사를 초치했다.

곧바로 중국을 향한 비판이 이어졌다. 미 국무부는 “위험하고 공격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했고, 페니 웡 호주 외교장관도 중국 해경국의 행동을 문제 삼았다. 엔도 가즈야 주필리핀 일본대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우려를 표명했다. 루비오 장관은 전날 왕 부장과 회담한 뒤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남중국해를 둘러싼 마찰은 몇 달째 이어져 왔다. 중국은 지난 5월 하순 스카버러 암초 주변에 구조물 여러 개를 설치했고, 지난달 30일에는 군과 해경국이 이 일대를 순시했다. 지난 10일에는 중국 관영 영자지가 필리핀을 비꼬는 동영상을 올렸다. 지난 12일은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주장을 물리친 국제 중재 판단이 나온 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불리한 자리는 피한다…아세안 대신 SCO로

왕 부장은 아세안 회의 대신 키르기스스탄으로 향한다. 23~25일 이 나라를 방문해 상하이협력기구(SCO)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하고, 다음달 말 수도 비슈케크에서 열리는 SCO 정상회의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에 나선다. SCO는 중국과 러시아, 이란, 파키스탄 등 10개국이 참여하는 신흥국 협력체로, 중국은 미국에 맞서는 세력을 결집하는 장으로 중시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권을 쥔 자리여서 다른 나라가 중국을 비판하는 장면이 나오기 어렵다.

중국이 이런 자리에 각료 파견을 접은 것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 5월 말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도 둥쥔 국방부장 대신 인민해방군 소장이 이끄는 대표단을 보냈다. 이 회의는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서방 참석자가 많아 중국의 해양 진출과 군비 증강이 도마에 오르는 일이 잦다. 반면 중국이 매년 가을 베이징에서 여는 안보 국제회의 ‘샹산포럼’은 참가국과 의제를 스스로 고를 수 있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중국은 열세에 놓일 수 있는 국제회의보다 주도권을 발휘하기 쉬운 자국 주최 회의나 우호국과의 협력 틀을 우선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흔들리는 아세안…中 호감도, 처음으로 美 앞질러

자국에 불리한 논의를 피하려는 중국이지만, 국제사회의 대중 비판이 반드시 거세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 퓨리서치센터가 지난 15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비교 가능한 20개국 기준 중국 호감도가 처음으로 미국을 앞질렀다. 아세안 5개국 중 필리핀을 뺀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태국,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이 미국보다 높았다.

아세안 안에서도 중국과의 관계 강화를 내세우는 나라가 나오고 있다. 모하맛 하산 말레이시아 외교장관은 전날 “아세안과 중국의 관계는 더욱 강인해야 한다”며 인공지능(AI)과 에너지 분야 협력에 의욕을 보였다. 아누틴 찬위라꾼 태국 총리는 이달 중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 등과 만나 외교·국방 장관이 참여하는 ‘2+2’ 회의 창설에 합의했다. 중국은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와도 같은 틀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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