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의 軍, 지정학적 압박이 낳은 생존지향적 사고[김정유의 Military Insight]

정치

이데일리,

2025년 11월 15일, 오전 08:00

김정유 장군은 육군사관학교 44기로 임관해 군 생활 대부분을 정책 부서가 아닌 야전에서 보낸 작전 전문가다. 한미연합사 작전참모처장, 제17보병사단장, 합동참모본부 작전부장 등을 역임하고 2021년 육군 소장으로 전역했다. 이 연재는 필자가 대한민국 군에 몸 담고 있는 동안 발전시키지 못했던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 부재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다. 20회에 걸쳐 미국·독일·이스라엘·일본의 작전적 사고 사례를 차례로 검토하고, 한국의 고대·현대 사례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해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논증할 예정이다. 국가별 작전적 사고를 비교·분석해 미래전 양상에 부합한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를 제안한다. <편집자주>


한반도의 역사는 늘 압박 속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대륙의 거대세력,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온 침략이 있었다. 넓은 종심도, 깊은 후방도 없는 땅에서 전쟁은 언제나 불리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우리의 전쟁은 이기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었다.

고려와 조선은 한반도의 지정학이 낳은 ‘압박의 전장’ 속에서 살아남은 왕조였다. 이 시기의 작전적 사고는 공세보다 생존, 공격보다 지속성을 중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지정학이 강요한 전략적인 제약에 대한 합리적 대응이었다. 공세의 부재는 의지의 부족이 아니라, 지리와 구조의 한계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도 고려는 기동적 방어라는 한국형 작전 사고의 또 다른 축을 발전시켰다.

◇압박 속의 기동

고려의 역사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거란, 여진, 몽골이 차례로 침입했고 국토는 항상 위태로웠다. 그러나 고려는 단순히 방어에 머물지 않았다. 한정된 공간 속에서 지형을 이용하고 시간을 벌며 살아남는 방식을 만들었다.

강감찬 장군은 1019년 거란의 10만 대군이 쳐들어오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후퇴를 반복했다. 적이 깊숙이 들어오자 귀주의 협곡으로 유인해 포위했다. 그는 싸움의 장소와 순간을 직접 선택했다. 이것이 고려식 기동적 방어, 즉 움직이며 싸우는 사고의 시작이었다.

윤관 장군은 1104년 여진족의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고려 숙종 때 별무반이라는 특수 군사조직을 만들었다. 그는 중앙군의 약화를 보완하기 위해 귀족의 기병과 농민 보병, 궁수들을 한시적으로 묶었다.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려로 이루어진 항마군으로 구성되었다.

별무반은 예종 때 여진족을 정벌하여 동북 9성을 개척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오늘날의 합동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각기 다른 세력을 급히 모은 임시 편성부대였다. 이 군대는 전장에서는 강했으나, 통합 지휘체계는 없어 결국 여진 정벌이 끝나자 해체되었다. 그러나 윤관은 기존 제도에 고착되지 않고 필요한 전력을 새롭게 조합했다. 이 유연한 발상은 이후 한국군 작전적 사고의 중요한 뿌리인 ‘상황에 맞게 전투력을 조합하는 사고’, 즉 적응형 사고로 이어졌다.

별무반은 교리의 혁신은 아니었지만 조건과 상황에 맞게 조직을 조합하는 협동과 합동성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몽골의 침입으로 인한 강화도 천도는 ‘전략’이 아닌 ‘생존의 결단’이었다. 몽골의 침입은 고려의 어떤 방어선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적의 속도와 화력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다.

최우 정권은 결국 개경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이 결단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피난형 조치였다. 그러나 도피만은 아니었다. 강화도는 바다로 둘러싸여 접근이 어렵고, 몽골군이 해전을 잘하지 못한다는 점을 활용했다. 즉, 싸움에서 이길 수는 없어도 나라를 지킬 방법은 찾은 것이다. 40년 넘게 이어진 항전 속에서도 고려는 무너지지 않았다. 강화도 천도는 전세를 뒤집은 전략이 아니라 ‘망하지 않기 위한 지혜’였다. 패배 속에서도 국가의 틀을 지켜낸 지속적 사고, 그것이 고려식 작전적 사고의 단면이었다.

무신정권 시기는 전장의 감각이 되살아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장수들은 명령을 기다리지 않았다. 상황이 바뀌면 스스로 판단하고 즉시 움직였다. 이때 생겨난 것이 현장 판단의 문화, 즉 ‘보고 기다리는 군대가 아니라 먼저 움직이는 군대’였다.

고려 후기에는 최영과 이성계 같은 장수가 등장했다. 이들은 여진과 왜구를 토벌하면서 병력을 작게 나누고 지형을 이용해 빠르게 이동하며 싸웠다. 큰 전투보다 짧고 결정적인 기동전을 중시했다. 물론 나라 전체를 하나로 묶는 큰 전략은 미흡했다. 장수들은 각자는 잘 싸웠지만 방향이 흩어졌다. 그럼에도 무신정권은 잊혀졌던 전장의 감각과 판단력을 되살렸다. 이 감각은 최영과 이성계, 그리고 조선의 이순신에게 이어졌다.

◇작전적 사고의 둔화와 이순신의 출현

조선은 문(文)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념으로 세워졌다. 조선 초기의 작전적 사고는 안정에 기대어 굳어졌다. 성리학적 문치체제는 군대를 싸우는 조직으로 보기 보다는 국가질서를 유지하는 통제기관으로 다루었다. 훈련도감, 진관제, 제승방략 같은 군사제도는 잘 정비됐지만, 군사적 판단보다 문서와 규정을 중시했고, 지휘관은 결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고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평화로운 시기가 약 200년간 이어지면서 지휘관들은 실전감각을 잃었고 전쟁은 더이상 생각으로 움직이는 영역이 아니라 틀에 따라 운영되는 행정절차가 되었다. 그 속에서 지휘관의 작전적 사고와 결심능력은 점점 약화되었다. 조선군은 체계는 남았으나 작전적 사고는 희미해졌다. 바로 그 틀 속에서 이순신 장군의 등장은 갑작스러운 천재적 예외가 아니라 조선이 잃어버린 지휘의 본능과 전문성이 다시 드러난 사례였다.

이순신 장군은 규정이 주지 못한 현장의 직감, 시간의 감각, 그리고 결심의 위대함을 복원하였다. 그는 조선군이 잃어버린 현장중심 지휘를 복원하였고, 이후 그의 방식은 이후 한국군 작전적 사고의 중요한 맥이 된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대는 무너졌지만, 이순신은 달랐다. 그는 단순히 해전을 잘한 장수가 아니라 싸움의 장소와 시간, 그리고 전투종결의 조건과 시점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결정하였다.

한산도 대첩(1592년)에서는 결전장소를 먼저 잡았다. 그는 바다를 단순한 수면이 아니라 움직이는 전장으로 보았다. 넓은 해역을 활용해 학익진을 펼치고, 적을 가운데로 끌어들여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명량해전(1597년)에서는 결정적 시간을 정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13척으로 130척을 맞서야 했던 명량, 이순신은 싸움의 타이밍을 기다렸다. 물살이 바뀌는 순간, 좁은 수로가 아군에게 유리해졌다. 그는 그 짧은 시간에 공격을 집중시켰다. 이것이 바로 싸움의 시간을 지배한 전투였다. 이순신장군이 안질이 날 정도로 물살의 흐름을 살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노량해전(1598년)에서는 전쟁을 끝내는 싸움을 했다. 전쟁의 마지막 전투 노량, 이순신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밤새 싸웠다. 그는 단순히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끝내는 싸움을 했다. 적의 해상 병력을 완전히 섬멸하여 전쟁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며 남긴 “전쟁이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 또한 한국군 군인정신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한산도의 공간, 명량의 시간, 노량의 결말은 이순신이 전투에 있어서 “어디서, 언제, 어떻게 끝낼 것인가”를 모두 자기 의도대로 결심하고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이었다. 그의 사고는 복잡하지 않았다. 바다를 읽고, 때를 기다리며, 결과를 스스로 만든 것. 이 단순한 세 줄의 사고가 오늘날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로 이어져야 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다시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한마디로 전쟁없는 군대, 사고없는 전장이었다. 훈련도감은 행정조직으로 변했고, 지휘관의 결심은 보고체계에 묶였다. 군은 존재하지만 생각과 사고가 사라진 군대가 되었다. 이 시기의 사고의 공백은 훗날 근대의 혼란과 식민지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사고로 싸움의 판을 새로 짜야

고려의 작전적 사고는 공세를 버린 수세가 아니라 공세를 대신한 기동적 사고였다. 조선은 고려의 사고를 제도화·체계화했지만 결국 사고의 생동감을 잃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다시 그것을 복원하였으나 계속 이어지지는 못했다. 모든 시도는 ‘패하지 않기 위한 방어’가 아니라, ‘언젠가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사고’였다. 지정학의 압박이 그들의 팔을 묶었지만, 그들은 사고로 싸움의 판을 새로 짰다.

요약하면 역사가 주는 교훈은 첫째, 제약은 사고의 출발점이다. 고려와 조선의 역사는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의 문제였다. 좁은 국토, 불리한 지정학적 상황, 열세한 전력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싸움의 시간과 장소를 스스로 정했다.

둘째, 체계보다 사람이 사고를 만든다. 조선의 제도는 완벽했지만, 생각하고 사고하는 지휘관이 사라지자 전쟁은 멈췄다. 반대로 이순신은 무너진 자리에서 사고로 체계를 만들었다. 전쟁은 장비나 숫자가 아니라 판단의 속도와 결심의 속도로 결정된다. 제도가 사고를 대신할 수는 없다.

셋째, 생존의 지혜가 곧 주도권의 지혜다. 고려의 기동적 방어, 강화도의 피신, 이순신의 시간 및 장소의 통제는 모두 ‘살아남기 위한 대응’이었지만, 결국 주도권을 되찾는 사고의 전환이었다. 버티는 것조차 능동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한국형 작전적 사고의 근본이다. 이 절박한 고민의 전통이 오늘날 한국군이 추구해야 할 작전적 사고의 정립으로 계승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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