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무장 투쟁기, 되살아난 한국형 공세적 사고[김정유의 Military Insight]

정치

이데일리,

2025년 11월 22일, 오전 08:00

김정유 장군은 육군사관학교 44기로 임관해 군 생활 대부분을 정책 부서가 아닌 야전에서 보낸 작전 전문가다. 한미연합사 작전참모처장, 제17보병사단장, 합동참모본부 작전부장 등을 역임하고 2021년 육군 소장으로 전역했다. 이 연재는 필자가 대한민국 군에 몸 담고 있는 동안 발전시키지 못했던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 부재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다. 20회에 걸쳐 미국·독일·이스라엘·일본의 작전적 사고 사례를 차례로 검토하고, 한국의 고대·현대 사례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해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논증할 예정이다. 국가별 작전적 사고를 비교·분석해 미래전 양상에 부합한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를 제안한다. <편집자주>


본 기고에서 다루는 것은 그동안 정립되지 못했지만 존재하였던 한국군이 계승해온 작전적 사고의 계보이다. 독립군과 광복군이 수행한 항일무장투쟁이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한국군 작전적 사고의 흐름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항일무장투쟁의 가치나 이념 등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휘관들의 작전적 사고를 군사학적 관점에서 분석했다는 점을 밝혀둔다.

1910년 조선은 국가도 군대도 잃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시기는 한국형 작전적 사고가 가장 선명하게 되살아난 시기였다. 조선 후기 200년 동안 제도와 체계중심의 사고가 지휘관의 판단력을 약화시켰다면, 1910년 이후에는 오히려 ‘개인 지휘관의 판단과 전장 감각’이라는 본질로 되돌아갔던 시기이다. 독립군과 광복군 지도자들은 열세한 조건 속에서도 전장을 선택하고, 시간을 통제하고, 적의 기능을 먼저 무너뜨리는 한국형 공세적 사고를 재창조해냈다.

◇일본군 강점과 약점을 정확히 파악

독립군 지도자들은 일본군의 전투 방식·기동 구조·병참 의존도를 세밀하게 파악했다. 그들은 일본군의 강점으로 화력·편제·조직력·도로·철도 중심 기동력을, 약점으로는 협곡·산악 지형에서 전개력 부족, 종대 취약성, 병참 의존도 등을 도출하였다. 그들은 전투를 ‘현장에서 반응하는 싸움’이 아니라 ‘적의 약점에 맞춰 전장을 설계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이는 항일무장투쟁기의 작전적 사고를 규정한 핵심 출발점이었다.

1920년 봉오동 전투는 한국형 공세적 사고의 교과서다. 홍범도는 먼저 전장을 선택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봉오동 협곡은 일본군이 종대로 늘어설 수밖에 없는 지형이었고, 아군은 양측 고지를 점령해 사격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일부 병력을 미끼로 노출해 일본군을 협곡으로 유인한 뒤, 종대가 전개되기 전에 양측 고지에서 동시 사격을 개시했다. 전장 선택→유인→순간 집중→ 종심 타격의 구조는 한국형 공세기동전의 전형이었다.

1920년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는 시간을 전장의 요소로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청산리 지역에서 10여 차례의 연속 교전을 수행하며 전투의 흐름을 스스로 통제했다. 낮에는 협곡에서 매복하고, 밤에는 고지에서 기습하며, 전장을 계속 이동시켜 일본군의 예측을 무너뜨렸다. 전투의 시작과 끝을 스스로 결정한 이러한 방식은 현대전에서 말하는 ‘Tempo Control’(시간 지배)을 1920년대에 실천한 것이었다.

◇독립군과 광복군의 작전적 사고

독립군은 전투의 승리보다 일본군 전쟁능력의 핵심 기능을 무너뜨리는 것을 우선했다. 철도 폭파를 통해 일본군의 기동 차단, 통신선 절단을 통해 지휘통제 마비, 보급소·헌병대 습격을 통해 병참 교란, 일본 주둔지 급습을 통해 지역 통제력을 마비시켰다. 이는 전투보다 ‘기능’을 먼저 무너뜨리는 현대전에서 말하는 효과중심적 사고와 거의 동일하다고 하겠다.

당시 미군에는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즉 전략첩보·특수공작·심리전·게릴라전·침투작전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현대 CIA와 미 특수전사령부의 직접적인 전신인 조직이 있었다. 광복군은 미 OSS와의 합동훈련을 통해 무전·통신·폭파·침투·공수 등 현대전 핵심 능력을 습득했다. 광복군의 지상·정보·공중을 결합한 합동개념은 해방 후 한국군이 미군식 합동작전을 신속히 흡수하는 기반이 되었다.

독립군·광복군 지휘관들의 작전적 사고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전장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고다. 어디서 싸울 지를 적이 아니라 내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둘째, 유인·분산·기동·집중을 조합해 전투의 ‘흐름’을 설계하는 사고였다. 셋째, 병력·장비 열세를 지형·야간·기습 등 조건의 변화로 극복하는 ‘상대적 우위를 창출하는 사고’가 돋보였다. 마지막으로 철도·통신·병참 기능 등 전쟁수행능력을 먼저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고로 설명할 수 있다.

◇물려받아야 할 작전적 사고 핵심요소

이같은 사고의 구조는 오늘날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지정학적 압박으로 인해 늘 수세적 위치에 놓였지만 실제 생존방식은 언제나 수세적 공간에서 공세적 사고로 주도권을 되찾는 방식이었다. 겉모습은 방어였지만 본질은 공세였던 것이다. 이는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를 논할 때 첫 번째 가치로 삼아야 할 역사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항일무장투쟁기는 한국형 공세적 사고의 근대적 부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일무장투쟁은 단순한 저항이 아니었다. 전장을 선택하고, 시간을 지배하며, 적의 전쟁수행기능을 먼저 타격해 전쟁의 구조를 바꾸는 작전적 실천의 시대였다. 지휘관 개인의 판단이 국가의 부재를 대체하였고, 한국형 작전적 사고는 외부 모방이 아니라 현장기반으로 재탄생되었다.

또한 열세 속에서도 상대적 우위의 전투여건을 조성하는 능력이 한국형 작전적 사고의 핵심이었다. 결국 고대-조선-근대의 작전적 사고의 단절이 아니라 한국형 전장 작전적 사고로 재정립되었고, 한국전쟁기간 지휘관 세대를 거쳐 오늘의 잠재적 작전적 사고의 토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