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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한국군이 전력·장비·병력에서 열세였던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군은 단순히 공격을 받아 버티는 군대가 아니라 수세 공간 안에서 공세 조건을 만들고 전장의 구조를 바꾸려는 사고를 유지한 군대였다. 이는 고대~항일무장투쟁까지 이어지는 한국형 작전적 사고의 핵심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한국형 작전적 사고의 3대 흐름
한국전쟁 이전에 형성된 한국형 작전적 사고의 흐름은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전장 선택으로 전투공간을 내가 정한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기습·매복, 고려의 기동방어, 이순신의 한산도·명량, 봉오동·청산리의 유인작전까지, 한국 전장은 항상 지형을 먼저 읽고 싸움터를 스스로 선택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수세 지형에서도 공간을 선택하는 순간 전투의 주도권이 생겼기 때문이다.
둘째는 시간지배로 전투의 리듬을 내가 통제한다는 것으로써 고대의 기습, 고려의 지연전, 이순신의 “싸울 시점을 내가 정하는 전투”, 항일무장부대의 야간기습과 전투 리듬 조절 등 한국군의 전투는 언제나 ‘템포 콘트롤(Tempo Control)’에 기반해 있었다.
셋째는 수세 공간에서 공세 조건을 만드는 사고로써 한국의 지정학적 특징은 본질적으로 수세적이었다. 그러나 전투 방식은 단순한 수세가 아니라 수세 공간에서 공세의 출발점을 만들어 역전시키는 구조였다. 한마디로 수세적 지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세적 사고로 전장을 바꾸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형 작전적 사고의 가장 본질적인 전통이며, 한국전쟁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다.
◇초기전선 붕괴, 정보·준비·전장 선택의 실패
19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은 한국군에게 가혹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은 약 240대의 T-34/85 전차를 포함한 기갑전력과 약 20여만명의 병력을 38선 일대에 집중시켜 기갑·보병·포병이 결합된 종심타격을 전개했다. 반면 대한민국 육군은 전차가 한 대도 없었고 총병력 또한 약 9만 8000명 수준으로 기동·화력·방호력에서 절대적 열세였다.
전쟁 첫날부터 전선 곳곳이 붕괴되었고 수도서울은 일주일 만에 함락되었다. 초기 전선의 붕괴는 단순한 준비 부족이나 지휘실패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전장의 시간, 공간, 기동을 애초에 상대에게 선점당한 구조적 열세라는 전쟁환경 자체가 결정적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전선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김종오 장군은 전쟁 전 북한군 2군단의 주공 가능성이 춘천 축선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지형·도로망·적 접근로를 분석해 방어선을 사전에 구축하고, 예비대를 유지하며 기갑 돌파에 대비했다. 철저한 사전준비와 전장인식으로 ‘적이 어디로,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를 전제로 전장을 미리 설계한 사고였다고 할 수 있다.
전쟁 발발 후 북한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며 북한군의 남하 속도를 2~3일 지연시켰다. 이는 전통적 ‘수세 속 공세 조건 창출’ 사고의 현대적 사례였고 아군의 수도권 전선 재정비와 후속 작전준비에 일정부분 시간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춘천지구 방어가 우연히 잘 버텨진 전투가 아니라 전쟁 전부터의 준비와 지형, 적 기도에 대한 판단 등 즉 작전적 사고에 기반한 방어였다는 것이다.
◇다부동 전투, 공세적 방어와 전장 재구성
1950년 8월에 실시된 낙동강 북방의 다부동 전투는 한국군이 공세적 사고를 가장 적극적으로 발휘한 전투이다.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전선이 붕괴되는 상황에서도 단순 후퇴를 거부하고 팔공산 능선을 중심으로 전장을 재구성했다. 야간 급습과 국지적 반격으로 적의 공세 템포를 끊고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유지될 시간을 확보했다.
다부동 전투의 목적은 고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버틸 시간을 만들고 이후 반격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최우선시한 공세적 방어의 전형이었다. 이는 전장선택-시간 지배-수세속 공세조건 창출이라는 한국형 작전적 사고가 현대전에서 다시 확인된 순간이었다.
1950년 8~9월 진행된 낙동강 전투는 단순한 최후방어선이 아니라 지형을 활용한 적 기동 제한, 일부 전술적 후퇴, 국지 반격 등 수세적 공세가 결합된 작전전구였다. 당시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은 전선 조정·부대 재배치·전투력 재정비 등 작전 운영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수행했다.
1950년 9월에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은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했다. 낙동강의 수세 공간에서 벗어나 전장을 서울·인천으로 이동시키며 북한군 종심을 단숨에 붕괴시킨 작전이다. 한국군은 이 경험을 통해 합동작전, 기동·화력·공중의 통합, 효과 중심 전투를 처음 실전으로 체득했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에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기습, 포위, 야간이동, 은폐, 심리전 등 다양한 기동 및 작전수행형태를 결합한 전쟁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 시기 한국군은 현대적 환경에서 공세, 수세, 기동, 유인, 지연 등의 모든 요소를 다시 학습해야 했다. 그러나 후퇴 속에서도 지형활용과 국지적 반격, 전선 재조정 등 수세속에서의 공세의 사고는 유지되었다.
◇유엔군이 제공한 작전적 사고의 현대적 도약
한국전쟁시 유엔군은 전투부대를 파견한 16개국과 전투지원 및 전투근무지원을 제공한 22개국으로 구성되어 전쟁기간동안 약 178만명에 달했다. 한국군은 이러한 유엔군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유엔군의 작전방식은 한국군 지휘관들에게 △합동성 △정보·정찰·통신 기반 전투 △전략적 기동 △효과 중심 전투라는 현대전의 핵심원리를 제공했다. 이는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가 한국 고유의 맥락속에서 형성되어 왔으나, 한국전쟁 동안 현대전 틀 속에서 구조적으로 확장되고 정교화되는 과정이었다.
한국전쟁은 한국형 공세적 사고가 현대전 속에서 다시 확인되고 재정립된 순간이었다. 전쟁 초반의 열세와 전선 붕괴 속에서도 한국군 지휘관들은 전장을 선택하고, 시간을 지배하며 수세공간에서 공세조건을 만드는 한국군 고유의 전통적 작전적 사고를 실전에서 되살려냈다.
동시에 한국군은 유엔군을 통해 합동성, 기동전, 정찰 및 통신 기반의 현대적 작전체계를 체득했고 중공군의 야간기동, 은폐, 포위, 심리전 등 다양한 전쟁 방식을 경험함으로써 전통적 사고에 현대전적 구성요소를 접목시키는 폭 넓은 작전적 학습을 이루었다.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비극적인 전쟁이었고 결과적으로 분단국가라는 슬픈 현실을 초래했지만 군사적인 작전적 사고 측면에서 보면 수세속의 공세라는 한국형 작전적 사고의 본질에 선진형 합동전 사고체계와 공산진영의 다변적 전쟁방식을 모두 체험한 재정립의 시간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한국군이 지정학적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공세적, 유연적, 효과중심의 사고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역사적 필연성을 확인해 주었으며 오늘날 한국군이 추구하는 ‘합동 전영역 작전’의 사상적·전통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