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戰 한국군에서 배워야 할 우리 군의 작전적 사고[김정유의 Military Insight]

정치

이데일리,

2025년 12월 06일, 오전 08:00

김정유 장군은 육군사관학교 44기로 임관해 군 생활 대부분을 정책 부서가 아닌 야전에서 보낸 작전 전문가다. 한미연합사 작전참모처장, 제17보병사단장, 합동참모본부 작전부장 등을 역임하고 2021년 육군 소장으로 전역했다. 이 연재는 필자가 대한민국 군에 몸 담고 있는 동안 발전시키지 못했던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 부재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다. 20회에 걸쳐 미국·독일·이스라엘·일본의 작전적 사고 사례를 차례로 검토하고, 한국의 고대·현대 사례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해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논증할 예정이다. 국가별 작전적 사고를 비교·분석해 미래전 양상에 부합한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를 제안한다. <편집자주>
베트남전 파병은 한국군에게 단순한 해외 전투가 아니라, 한국전쟁에서 재정립된 작전적 사고를 전혀 다른 전장 환경 속에서 시험하고 확장한 경험이었다. 정글과 고지, 농촌과 밀림, 주민과 게릴라, 도시와 보급로가 얽힌 베트남 전장은 전통적 의미의 ‘전선’이 존재하지 않았다. 공간이 아니라 관계망이 전장을 구성했고, 지형보다 주민·보급·심리·정보가 전쟁의 결정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국군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한국형 공세적 사고를 단순히 되풀이한 것이 아니라, 해외 전장에 적응하고 확장하여 적용했다.

◇네트워크가 전장을 형성한 전쟁

베트남전에서 북베트남 군 및 베트콩은 장기간 잠복·분산·통합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전장을 운영했다. 교전이 없는 기간이 곧 전투 준비나 조직 재구축 기간이었고, 주민 조직과 보급로는 지상부대보다 더 깊은 종심을 형성했다. 전장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연결망’으로 작동했고, 작전은 고정된 전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영향력의 범위를 두고 전개되었다. 따라서 작전적 사고는 전통적 정규전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었으며, 정보·정찰·심리·관계가 작전의 기반이 되었다. 전투는 정글에서 일어났지만 승패는 주민조직·보급로·정보망에서 결정되었다.

한국군은 한국전쟁에서 확인된 한국형 작전적 사고의 핵심, 즉 △전장을 선택하고 △시간을 지배하며 △수세 공간에서 공세조건을 만들고 △효과를 우선하는 사고를 베트남전에서 체계적으로 적용했다. 수세적 주둔이 아니라 선제적 탐색·정찰·기동을 통해 주도권을 확보했고, 작전의 출발점을 전투가 아니라 정보·정찰·협조체계의 구축으로 설정했다. 한국군의 목표는 적과 교전을 성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적의 활동 반경을 압축하고 거점을 무력화하며 재조직 능력을 약화시키는 전장 통제였다.

1966년 10월 육군 9사단(백마부대)에 의해 시행된 닌호아 작전은 적을 찾는 전투가 아니라 적을 유도하여 압축하고 정찰·매복·기동의 결합이 돋보인 전투다. 한국군은 대규모 수색을 지양하고 정찰을 선행한 뒤, 특정 시간과 공간에 적을 유도해 짧은 기동으로 집중 타격했다. 이는 적에게 시간과 공간을 주지 않고 작전 환경을 좁혀가는 방식이었다.

1966년 말 해병대 2여단(청룡부대)에 의해 시행된 퐁디엔 계곡 작전은 적을 섬멸하기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적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지역 안정화 기반의 전장통제를 수행하였다. 작전 이전에 정보망과 주민 협력체계를 구축해 적의 통행·보급·연락 기능을 약화시킨 뒤 교전을 실시했다. 단순 교전이 아닌, 전장 전체를 장악하는 접근이었다.

1967년 해병대 2여단(청룡부대)에 의해 시행된 짜빈동 작전은 조직을 무너뜨려 기능을 타격하는 전투방식이었다. 거점이나 적 병력의 제거가 아니라, 중간지휘자·연결조직·보급·연락선을 집중적으로 무력화 해서 적 조직의 기능을 붕괴시키는 방식이었다. 전투의 승패가 아니라 전장의 작동 메커니즘을 무너뜨리는 작전이었다.

◇채명신 장군의 작전적 사고

베트남전 당시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의 지휘는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가 전투수준을 넘어 전장운영으로 확장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는 미군식 대규모 소탕작전이 베트남의 주민·지형·심리·정보환경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한국군 고유의 정찰·매복·기동 모델을 주 작전방식으로 채택했다.

또한 손실을 감수하는 대가성 출혈전이 아닌 병력 보존을 통해 전장을 통제하는 방식을 원칙으로 삼았고, 주민 기반 정보망 확보를 작전의 시작점으로 설정했다. 이러한 접근은 전투 실적이 아니라 적의 작전능력 약화라는 효과를 성과 기준으로 삼는 사고체계로 이어졌으며, 이는 한국형 공세적 사고가 해외 전장에서 체계적으로 적용된 첫 사례였다.

한편,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우선적으로 소모전을 주된 작전의 목표로 삼아 작전적 사고의 마비를 초래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또 미국은 전면전을 회피하고 확전을 통제하기 위해 점진적인 군사력의 운용을 채택하였다. 이는 폭격이나 지상군의 투입을 단계적으로 진행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함께 전투력이나 장비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작전-전술의 일관성’이 부족했다는 데 패인이 있다. 전략은 공산화 확산 저지였지만, 작전은 정글 소탕, 전술은 전과 수치 경쟁으로 분리되었다. 전투 승리가 전쟁운영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게다가 미군은 전장을 지형중심으로 관리했으나 북베트남·베트콩은 주민·보급로·정보망 중심으로 운영해, 전투에서 승리해도 전장 통제권은 확보되지 않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는 작전적 사고체계의 상호 불일치에서 비롯된 전장 운영상의 한계였다.

베트남전의 실패는 미군에게 군사혁신 수준의 근본적인 자성을 가져왔으며, 1980년대 이후 전략적·작전적·전술적 수준에서 대대적인 재정립 작업이 이루어진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베트남전, 한국형 작전적 사고의 확장기

베트남전은 한국군에게 ‘수세 속 공세’라는 한국형 전통적 사고를 해외의 비정규전 환경에서 검증하고 체계적으로 확장한 첫 번째 전쟁이었다.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은 △정보 우위 기반 공세 △수세 공간에서 공세 조건 창출 △효과 우선 △네트워크 중심 전장인식 등으로 한국형 작전적 사고의 고유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는 이후 한국군 국지도발대비작전의 사고체계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한국군이 추구하는 합동 전영역 작전의 개념적 토대로 이어졌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경험은 세계 군사 사조에 비추어 볼 때 선구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한국군은 이미 1960년대에 소모전의 한계와 비효율성을 파악하고 효과중심과 적의 전투기능의 붕괴를 추구했다. 반면 미군은 전술했듯이 베트남전에서 실패한 후 작전술을 복원하고 1990년대 효과중심작전을 도입한 바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가 미군의 군사혁신보다 시대적으로 앞서 나갔던 지점이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베트남 전에서 정립한 한국형 작전적 사고는 현재의 장교단에게 복원과제를 제시한다.

한국군이 전장운영과 효과를 목표로 삼았던 고차원적인 전통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절차운용 중심의 사고에 머무는 것은 위대한 전통의 단절이 명확하다는 점이다. 또한 채명신 장군이 미군 교리라는 구조적 제약 속에서 독자적인 작전설계를 이끌어 냈듯이 현재 장교단은 평시 작전권과 연합사 협조라는 현실적 제약 속에서도 능동적 억제라는 공세적 개념을 실현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작전적 전문성이 요구된다.

결론적으로 승패 논쟁이나 정치적 해석과 무관하게 베트남전은 한국군 작전적 사고가 해외 전장에서 독자적 모델로 정립된 사례이다. 그리고 한국군이 추구하는 독자적 작전적 사고의 가장 강력한 정체성이며, 현재의 전문성 부족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엄중한 역사적 기준을 제공한다. 이 기준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미래 한국군의 핵심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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