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로 시작하는 한·러 관계 재도약[공관에서 온 편지]

정치

이데일리,

2026년 4월 03일, 오전 05:00

[박지은 주상트페테르부르크총영사] ‘유럽을 향한 창’, ‘북방의 베니스’ 등 많은 별칭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또 다른 이름은 ‘러시아 문화·예술의 수도’다. 도시 중심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수많은 역사적 건물 가운데 특히 세계 4대 박물관 가운데 하나인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마린스키 극장은 이러한 문화·예술 수도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박지은 주상트페테르부르크총영사(사진=외교부)
마린스키 극장이 위치한 곳은 ‘극장광장’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음악·무용·연극 공연을 올리는 무대가 100개가 넘지만 상트 사람들은 유독 이곳을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극장광장’이라고 부를 만큼 마린스키 극장을 특별하게 여긴다.

러시아인들의 발레 사랑은 각별하다. ‘백조의 호수’를 비롯한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 그리고 ‘지젤’, ‘돈키호테’ 등 세계 발레사를 대표하는 작품들은 러시아에서 탄생했거나 이곳에서 예술적으로 완성됐다. 특히 마린스키에서 탄생한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라 바야데르’ 등은 지금도 전 세계 무대에서 끊임없이 공연되며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마린스키 극장은 러시아 예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이 역사적인 무대에는 두 명의 한국인 발레리노가 있다. 올해 입단 15주년을 맞는 수석 발레리노 김기민은 이미 ‘마린스키의 얼굴’이라고 불릴 만큼 극장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한국에서 아이돌급 인기를 얻고 있는 전민철은 지난해 퍼스트 솔리스트로 입단해 마린스키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예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인 발레리노들이 러시아 발레의 요람이라 불리는 이 무대의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은 한국 문화와 예술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러시아에서 한국인 발레리노를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우호적이다. 두 발레리노는 대표 작품들의 주역으로 무대에 서며 전 좌석을 매진시키는 티켓파워를 보여주고 있다. 김기민과 전민철이 무대에 서는 날이면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한국인 관객에 대한 러시아 관객들의 따뜻한 관심이 이어진다. 일부 관객들은 이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 찾아왔다고 말하며 어떻게 한국에서 이렇게 발레를 잘하는 무용수가 나왔느냐고 감탄하기도 한다. 이러한 반응을 접할 때마다 두 발레리노를 통해 한국에 대한 호감과 관심이 자연스럽게 확산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한국과의 직항도 없고 관광 방문도 어려워 직접적인 인적 교류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예술은 정치와 외교의 긴장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세계 발레의 중심지인 이곳 마린스키 무대에서 러시아 관객들의 환호를 받으며 한국인 발레리노들이 비상하는 모습은 더욱 반갑고 의미 있게 다가온다.

러시아는 양국이 조선과 러시아 제국이던 19세기부터 외교적으로 교류해 온, 서로의 역사 속에 많은 기억을 공유한 중요한 이웃 국가다. 지금은 한·러 관계의 흐름이 잠시 멈춰 선 듯 보일지라도 무대의 장막이 걷히듯 언젠가 교류의 길도 다시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 마린스키 무대 위 한국인 발레리노의 힘찬 점프처럼 양국 관계도 다시 한 번 높이 도약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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