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한국외국어대 국가전략사업단에서 ‘디아스포라에서 문화 허브로: 고려인 강제이주 90년과 한국-카자흐스탄 문화협력의 미래’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며, 필자는 하나의 질문에 집중하게 됐다.
우리는 왜 여전히 디아스포라를 과거의 역사로만 바라보고 있는가. 2027년은 고려인 강제이주 90주년이 되는 해다. 오랫동안 이 역사는 비극으로 기억돼 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과거가 아니라 그 이후 형성된 현재의 구조다.
박민지 카스피안그룹 한국법인 이사가 지난달 24일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대에서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단장 강준영 교수) 주최로 열린 3월 콜로키움을 통해 디아스포라에서 문화 허브로: 고려인 강제 이주 90주년과 한국-카자흐스탄 문화 협력의 미래 주제 강연을 했다. (사진=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
90년이 지난 지금,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경제와 사회의 핵심 주체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한국과 중앙아시아를 동시에 이해하는 언어와 문화, 네트워크를 갖춘 매우 희소한 인재 집단이다.
특히 고려인 사회는 이미 현지에서 영향력을 갖춘 엘리트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지난해 카자흐스탄 포브스 기업인 50인 중 약 10%가 고려인 출신이다.
알라타우시티 개발의 핵심 인물인 김바체슬라프 회장과 카스피안 그룹의 최유리 회장은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사례다. 이는 고려인이 단순한 디아스포라가 아니라 현지 시스템을 움직이는 핵심 자산임을 보여준다.
강연이 끝난 후 한국외국어대 +HK국가전략사업단 정기웅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고려인 강제이주 90주년은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이자 영광의 역사이다. 온갖 역경을 딛고 높은 교육열과 헌신적인 자기희생으로 카자흐스탄 사회에서 엘리트로 자리매김한 고려인들은 한국과 카자흐스탄 양국 관계의 중요한 자산이며 양국 문화협력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위치한 고려극장 입구 모습이다.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온 상징적인 공간이다. (사진=박민지 이사 제공)
수혜자가 아닌 동반자
우리는 그동안 고려인을 ‘도움이 필요한 동포’라는 시선으로 바라봐왔다. 물론 그 역시 사실의 일부다. 그러나 이 관점만으로는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상대를 수혜자로만 규정하는 순간, 그들의 잠재력과 네트워크는 정책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고려인은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다. 문화 협력은 국가 간 산업 협력을 촉진하는 가장 효과적인 ‘윤활유’이자, 신뢰를 형성하는 핵심 매개체다.
최근 한국은 K-문화라는 자산을 통해 산업과 투자로 이어지는 협력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중앙아시아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고려인을 매개로 한 문화 협력은 산업과 경제로 이어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경로다.
카자흐스탄 K-PARK, 협력의 실행 모델
이러한 관점은 카자흐스탄의K-PARK 프로젝트로 구체화 되고 있다. K-PARK는 고려인을 중심으로 설계된 약 10헥타르 규모의 문화 복합 공간이다. 고려인들이 조성하는 이 공간은 선조의 기억과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문화 계승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에서 양성된 인재는 콘텐츠와 산업으로 확장되며 문화는 산업과 경제로 연결된다. 이곳은 오는 9월 고려인강제이주90주년 기념식으로 개장될 예정이다. 디아스포라를 전략 자산으로 전환하는 모델이 될 것이다.
한-중앙아 정상회의, 협력의 전환점
올해 9월에는 제1차 한-중앙아 정상회의가 개최될 예정이다. 중앙아시아 5개국 정상들이 참여하는 이번 회의는 협력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릴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특히 문화 협력은 경제와 산업으로 확장될 수 있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이번 정상회의를 통해 문화, 산업, 인재를 연결하는 보다 구체적인 논의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1923년 창간된 고려일보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고려인의 정체성과 역사를 기록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사진=박민지 이사 제공)
이번 강연을 교수와 연구자 중심으로 진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필자는 현장에서 협력을 실행하는 입장이지만 지속 가능한 구조를 위해서는 학문적 연구와 전략적 정당성이 필요하다.
강연을 마친 뒤 이를 주관한 강준영 교수(한국외국어대 +HK국가전략사업단장)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려인 특히 카자흐스탄 지역의 고려인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된 의미 있는 강연이었다”며 “향후 우리 정부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고려인에 대한 관심과 교류를 제고하기 위해 더욱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의 실행과 학계의 연구가 결합할 때, 협력은 구조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강제이주 90주년, 전환의 출발점
2027년, 고려인 강제이주 90주년은 단순한 기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90주년은 과거를 정리하는 시점이 아니라 새로운 전략을 시작하는 출발점이어야 한다. 감정적 연대를 넘어 문화와 산업, 인재를 연결하는 구조적 협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 강연이 끝나고 박민지 이사(맨앞줄 왼쪽에서 네번째), 강준영 교수(왼쪽에서 다섯번째),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부회장인 최 알렉산드라 박사(왼쪽에서 세번째), 정기웅 교수(맨오른쪽) 등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