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넘치는데 왜 국민은 더 불안한가[이근면의 품격 몽상]

정치

뉴스1,

2026년 6월 01일, 오전 06:30

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사람들연구소 이사장)

법은 다수결의 정의인가 보다. 요즘 법이 뚝딱 만들어지는 느낌이다. 토론과 합의, 숙고와 함께 부작용을 고민하고 오랜 시간 다듬고 가꿔 아름답고 이로운 법과 기준이 바람직한 입법의 모습일 텐데 일단 법으로 반대를 눌러 버리고 이견 자체를 봉쇄하려 하니 아마 이게 뉴-노멀 입법인가 보다. 입법도 국격인데 과연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많이 만드는 국회보다 잘 만드는 국회
정치가 국가의 방향을 정하고 행정이 그 방향을 실행한다면, 입법은 국가 운영의 설계도다. 설계도가 흔들리면 건물이 흔들리듯, 입법이 흔들리면 국가 전체가 흔들린다. 법은 사회의 최후 수단이자 최소한의 규칙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법을 문제 해결의 만능 도구처럼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이제 법을 만드는 데는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가 된 듯하다. 매년 수많은 법안이 발의되고, 국회는 그 숫자를 성과처럼 이야기한다. 법안을 많이 발의한 의원이 성실한 의원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정치권은 법을 만들면 일을 한 것처럼 느끼고, 새로운 규제를 만들면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법은 계속 늘어나는데 국민은 더 편해졌는가. 규정은 촘촘해지는데 사회는 더 안정됐는가. 처벌은 강해지는데 사람들은 더 안전해졌다고 느끼는가.

오히려 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기업은 무엇을 해도 되는지보다 무엇을 하면 문제가 되는지를 먼저 고민한다. 공무원은 정책 효과보다 책임 소재를 먼저 계산한다. 국민은 법과 규정이 늘어날수록 자유보다 불안을 더 크게 느낀다.

방청 온 학생들이 국회 본회의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뉴스1 © 뉴스1 유승관 기자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문제가 발생하면 법 하나를 더 만드는 방식에 익숙해져 왔기 때문이다.

소위 'ㅇㅇㅇ법'이란 사건이나 사람 이름을 차용한 특정 목적의 법들이다. 물론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사건들이다. 사건이 발생하면 대책이 나온다. 대책은 새로운 법으로 이어진다. 사고가 나면 특별법이 생기고, 사회적 논란이 커지면 규제가 강화되며, 여론이 들끓으면 처벌 수위가 높아진다. 물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입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복되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법이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중첩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새로운 법은 만들어지는데 오래된 법은 그대로 남는다. 유사한 규제가 여러 부처에 중복되고, 법률 간 충돌이 발생하며, 현장에서는 어느 규정을 따라야 하는지 혼란이 생긴다. 국민은 법이 많아질수록 더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맞는지 모르는 상태에 놓인다.
약도 과하면 독이 된다. 법도 마찬가지다.

입법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다. 국가의 품격은 법의 양이 아니라 법의 질에서 나온다. 세계적으로 안정적인 국가일수록 법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법이 적다는 의미가 아니다. 법이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하고, 사회와 시장이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둔다는 의미다.

반면 신뢰가 부족한 사회는 점점 더 많은 규칙을 만든다. 사람을 믿지 못하니 규정을 만들고, 규정을 믿지 못하니 처벌을 강화한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새로운 법을 만든다.

입법의 품격
법이 없어서라는 당국자 말을 흔히 듣는다. 세세한 것까지 관행과 상식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들조차 뒷감당을 의식한 소극적 대응이다.

결국 법이 신뢰를 대신하기 시작하는 순간 국가는 복잡해진다. 입법의 품격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첫째, 최소 입법 원칙이 필요하다. 모든 문제를 국가가 법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시장과 시민사회가 스스로 조정할 수 있는 영역까지 국가가 개입하기 시작하면 사회는 스스로 움직이는 힘을 잃는다. 법은 사회를 대신 움직이는 도구가 아니라 사회가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최소한의 장치여야 한다.

둘째, 예측할 수 있는 입법 구조가 필요하다. 법은 정권이나 여론 변화에 따라 급격하게 흔들려서는 안 된다. 기업은 10년을 보고 투자하고, 국민은 자신의 삶을 설계한다. 법이 자주 바뀌면 국가 자체가 불안해진다.

셋째, 입법 영향평가를 강화해야 한다. 새로운 법을 만들기 전에 최소한 세 가지 질문은 반드시 해야 한다.

"누가 혜택을 받는가." "누가 비용을 부담하는가." "10년 뒤에도 작동할 수 있는가."

법은 만드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수십 년간 사회를 움직이는 규칙이 되기 때문이다.

넷째, 법의 일몰제와 정리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사람에게 정년이 있듯 법에도 퇴출이 필요하다. 역할이 끝난 법, 현실과 맞지 않는 규제, 중복된 제도는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 법을 만드는 능력보다 불필요한 법을 없애는 능력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국가적 법률 '리스트럭처링'(Restructuring)이 절실하다.

한 가지 놓치고 있는 부분은 법이 생기면 그 법을 집행할 공무원과 공공비용이 추가로 증가하고 사회적 비용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된다. 즉 사후 약방문 식인 법 제정보다 예방적 행정과 활동이 오히려 국민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게 된다. 병을 잘 치료하는 것보다 건강을 유지 관리해 병을 예방하는 것이 건강관리의 기본인 것처럼.

제22대 국회의원들이 2024년 9월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국회 개원식 겸 제418회 국회(정기회) 개회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 뉴스1 이광호 기자

법이 신뢰를 대신하는 현실
지금 대한민국은 성장의 시대를 지나 운영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성장의 시대에는 속도가 중요했다. 그러나 운영의 시대에는 안정성과 신뢰가 더 중요하다. 선진국은 법이 많은 나라가 아니다. 적은 법으로도 질서가 유지되는 나라다.

법이 신뢰를 대신하는 순간 사회는 복잡해진다. 그러나 신뢰가 법을 보완하는 순간 사회는 단단해진다. 정치의 품격이 방향을 만들고, 행정의 품격이 실행한다면, 입법의 품격은 국가가 움직이는 규칙 자체를 만드는 일이다.

좋은 국회는 법을 많이 만드는 국회가 아니다. 국민이 굳이 법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만드는 국회다.

20년 전의 국회보다 10배 이상 법안이 폭증하는 동안 우린 더 잘 살아지고 더 고민이 적어지고 더 안전하고 더 행복해졌을까? 과연 국회의원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 걸까?

opini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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